희생 속에 잡은 혁신의 황금기회
정치싸움으로 다 날려버린 현실
미래 위한 큰 틀의 統治 보여줘야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 joonh@snu.ac.kr >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벌어졌다. 저녁시간에 한번 들를까 했던 곳에서 한순간에 십수 명의 인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희생을 당하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언제 어떤 횡액을 당할지 불안한 계절이다. 올해는 필경 이미 일어난 일만 가지고도 명실상부 ‘대형 참사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안타까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골든아워(황금시간)’를 놓쳐 아까운 목숨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하지만 골든아워를 놓친 것은 해양경찰청 구조대나 방재당국만이 아니었다. 대통령과 정부,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그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반드시 붙잡았어야 할 기회를 놓쳤다. 그 많은 어리고 억울한 목숨을 치른 국가 개조의 기회, 근본적 혁신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저만치 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반년이 지난 이 시점, 대통령 정치의 골든아워가 소진되고 있는 터에 또다시 판교 참사가 터졌다. 경기도와 성남시의 책임을 둘러싸고 여야가 서로 물고 뜯는, 혹여 잊을세라 다시 찾아온 골든아워를 허비하는 광경은 목불인견이다.
세월호 참사는 온 나라 모두가 애도해 마지않은 희대의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잠시 대통령 정치의 골든아워가 열렸던 순간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구조임무를 맡은 기관들과 관료들을 꾸짖던 대통령의 화법을 힐난하기도 했지만 딱히 대통령 자신이 원인 제공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깊은 슬픔과 좌절 속에서도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사태에 대한 모든 최종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대단히 불편한 처지였기에 국가 개조, 나중엔 국가혁신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은 올바른 대통령 정치의 수순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해묵은 적폐를 척결하고 안전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국가와 사회의 안전장치를 굳건하고 일관되게 만들어 나가는 결기를 보여줬다면, 아마도 창조경제의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도 박근혜 정부의 치적을 갈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당과 시민단체가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순간,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야당과 유가족의 단식투쟁과 농성을 정권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던 탓이었을까. 대통령 정치는 돌연 빗장을 걸어 잠갔다.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한 것은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여야 대립, 특히 야당 탓이라 핑계를 대겠지만, 누구도 대통령 정치의 골든아워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아직도 골든아워가 남아 있는 것일까. 여야를 떠나 대한민국호의 안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있을까. 혹 말미가 주어지더라도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부가 내놓은 해양경찰청 폐지와 국가안전처 신설방안을 반영한 정부조직법 개정을 둘러싸고 국회에 다시금 전운이 감돈다. 야당의 저지로 시간이 지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 전체의 미래를 위해 큰 틀에서 감수성과 상상력을 발휘해 대범하게 접근하는 대통령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장관들이 무언가 쫓기듯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역력할 뿐이다. 개헌과 공무원연금개혁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당 대표 사이의 옥신각신이 그렇고 가히 경기부양용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한 ‘초이노믹스’의 경제살리기가 그렇다. 지시가 있었든 아니든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시간에 쫓겨 질주하는 동안 정국은 점점 더 팽팽히 긴장의 주름이 잡힌다. 이러다가 그나마 끝나가는 골든아워를 허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에서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제2의 건국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안전국가의 원년은 괜찮지 아니한가. 아직 임기가 반 이상 남았고 장관들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매진하고 있지만 그 어느 과제도 단기에 괄목할 성과를 이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장관도 장관이지만 대통령 정치가 좀 더 대범하게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골든아워가 닫히기 전에 대한민국호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 joonh@sn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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