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신분 사칭

입력 2014-10-03 22:11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내가 암행어사로 서도(西道)로 나온 뒤부터 멀거나 가까운 간사한 무리들이 암행어사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사칭하거나 혹은 암행어사와 친밀한 사이라고 하면서 아전과 백성들을 공갈 협박하며 돈과 재물을 빼앗기도 했으니 목을 베어도 용납할 수 없는 죄이며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조선 순조 때 암행어사로 126일간 평안남도를 순찰했던 박래겸이 지은 ‘서수일기’의 일부다.

암행어사의 ‘끗발’에 기대어 어사를 사칭하거나 그와의 친분을 들먹이며 못된 짓을 하고 잇속을 챙기던 무리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대는 바뀌어도 권력자나 그 측근을 사칭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다.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사칭해 대기업 사장에게 전화로 인사청탁을 하고 해당 회사에 1년여를 다녔던 사기꾼이 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이다. 다른 회사에도 유사한 수법을 쓰다가 덜미가 잡혔다고 한다. 그 대담함도 그렇지만, 그 정도 사기에 쉽게 넘어간 우리 사회의 허술함도 모두 놀라울 뿐이다.

청와대 사칭 사기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에는 청와대가 직접 청와대 사칭 사기 59건을 분석해 그런 사기꾼에게 속지 말라고 공개리에 당부할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유사 사건이 터졌다. 현 정부 들어서도 청와대 행정관을 사칭한 전과 7범이 인사청탁을 미끼로 수억원을 가로챘다가 지난 4월 체포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청와대 사칭 사건 중 상당수는 스스로를 청와대 비밀요원이나 암행어사라고 하는 등 있지도 않은 직책을 둘러댈 정도로 허술한데도 넘어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은 비록 실제 청와대 비서관의 이름을 대기는 했지만, 어엿한 유수 대기업 사장이 전화 한 통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는 점에서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나칠 정도로 개인정보 유출이 심하고 내부고발도 많은 게 우리 사회다. 비밀이라곤 없다고 할 정도로 폭로와 까발리기가 기승을 부린다. 그런 유리알 같은 사회에서 신분 사칭 사기가 횡행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권력 앞에선 한없이 약하고 소위 ‘빽’과 연줄도 여전하다는 얘기다. “내가 누군지 알아?” 식으로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이 이렇듯 활보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한편으론 사회 곳곳이 아직 투명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자신이 떳떳하다면 누구 앞에서건 움츠러들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불륜을 폭로한다는 사기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그렇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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