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초과학 기반 없는 노벨상은 虛像

입력 2014-10-01 01:05
"실용기술 개발에 급급했던 한국
기초과학 지식창출 위해 힘쓰고
교육도 강화해야 노벨상꿈 이룰것"

이덕환 <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duckhwan@sogang.ac.kr >


다시 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다음주 화요일부터 생리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이 차례로 발표된다. 올해도 많은 사람이 한국 과학자의 수상 소식을 애타게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학술정보 서비스사인 톰슨로이터가 발표한 9개국 27명의 노벨상 수상 예상자 명단에 처음으로 한국 과학자 2명이 포함됐다고 한다. 2002년부터 예상자를 발표해왔던 톰슨로이터의 누적 적중률이 20% 수준이라니 크게 기대할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소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갈증을 탓하기는 어렵다. 경제·스포츠·대중문화 분야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분명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376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 중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올해보다 5.9% 늘어난 18조8000억원에 이른다. 노벨상 수상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초과학연구원(IBS)도 설립했다. 그런데도 한국이 노벨상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무능하거나 게을렀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열심히 노력했고, 놀라운 성과도 거뒀다. 다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노벨상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이다.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의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에 노벨상의 영역인 기초과학은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기초과학보다 생존을 위한 기술 개발이 훨씬 더 급했다. 비록 선진국의 기술을 흉내 내는 낮은 수준의 모방형으로 시작했지만 그동안 한국 과학계가 이룩한 기술 개발의 성과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과학기술의 불모지에서 뒤늦게 출발한 한국이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반도체·자동차·조선·석유화학·원자력·정보기술(IT) 산업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과학자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과학계가 일궈낸 기술 개발의 성과는 기초과학 분야의 노벨상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선진국들이 애써 가꿔놓은 과실을 이용한 기술 개발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이 형편이 어려울 때 선진국에 진 빚은 되갚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그래야만 한국도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지속적인 번영에 필요한 기초과학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선진국들의 치열한 노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초과학은 인류 사회의 발전을 위해 선진국에 맡겨진 성스러운 의무이고, 노벨상은 그런 선진국들을 위해 마련된 축제다. 기초과학이 미래의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라는 일부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눈앞의 이익을 챙기려는 응용기술의 개발에 필요한 기초연구를 기초과학으로 왜곡해서도 안 된다. 실용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과학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노벨상의 꿈은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노벨상 이후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자칫 노벨상의 권위가 한국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노벨상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198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만의 과학기술정책 실패 경험을 주목해야 한다.

과학교육도 바꿔야 한다. 학생들이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과학·수학을 애써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교육학자들의 손에 과학교육을 맡겨둔다면 노벨상은 영원히 공허한 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덕환 <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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