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한국의 '샌드위치' 외교가 '빈대떡'이 된 사연

입력 2014-09-25 20:00

(전예진 정치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외교안보연구기관 대표들과 초청 간담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던 모두 발언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중국과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있어서다.

그러나 미리 배포된 발언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외교적 타격을 입게 됐다. 미흡한 현장 대처도 국제적 망신이지만 대통령의 최종 확인을 거친 발언문이 몇 시간 만에 수정될 만큼 외교 전략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현장에서 삭제된 발언은 한·중 외교 방향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크게 두 가지다. “한국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오해다, 한·미 동맹을 전제로 한·중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겠다”라는 것과 “과거사의 핵심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이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자 보편적 인권에 관련한 사안”이라는 내용이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이 직접 한·중, 한·미 관계를 정립하고 국제 무대에서 일본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예상되는 발언이다. 청와대는 행사 종료 시점까지 엠바고(특정시점까지 보도유예)를 전제로 이날 오후 2시쯤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4시간 만에 발언문은 전면 수정됐다. 박 대통령이 전날 유엔총회 기조 연설에서 위안부 문제를 우회적으로 언급한데 이어 또 다시 일본을 겨냥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으로부터 압박감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날 행사의 성격상 미국 여론 지도층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거듭 강조할 경우, 한국이 일본을 물고 늘어진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일본이 국장급 협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점에서 대통령의 비판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며 “한일 수교 50주년 행사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중 관계에 대한 발언도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는 효과보다는 중국에 불필요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통일에 대해 국제사회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끌어내고 협조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외교적으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청와대는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부랴부랴 뒷수습에 나섰다. 이미 보도된 내용을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부인하고 나서자 파장은 더 커졌다. 한국이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속내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관심을 끌게 됐다.

미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언질을 받은 게 아니냐는 불명예스러운 추측도 흘러나온다.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가까이 지내고, 일본과의 관계도 개선해 보려는 ‘약은’ 전략도 그대로 노출됐다.

외교부는 외교 전략 부재라는 비판에 청와대로 화살을 돌렸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번 해프닝이 벌어진 배경에 대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질문”이라며 “그것은 청와대 쪽에 질문해야지 외교부 대변인 차원에서 답변 드릴 내용은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서도 중심을 잡으며 실리를 추구하는 ‘샌드위치’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4시간 만에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히는 줏대없는 ‘빈대떡’ 외교라는 걸 보여줬다. /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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