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에 의한 가장 큰 충격은 자유무역의 시작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일본과의 무역은 거의 단절된 상태였지만 중국과는 홍삼을 수출하고 비단을 수입하는 육로 무역이 자못 활발하였는데 수량이나 품목, 그리고 인원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한된 관리무역은 1883년까지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고 시전상인이 독점하던 서울마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자 불가능하게 되었다. 관세율도 낮았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중국과 체결한 ‘조청무역장정’에서 수입 관세율을 5%로 정한 다음에는 다른 나라와의 통상조약에도 채택되거나 여기에 맞추어 개정되었다. 1883년에는 ‘내지 관세’가 금지되어 일단 통관된 상품에 대해서는 어떠한 과세도 불가능하였다.
공장에서 생산한 면제품이 가장 비중이 높은 수입품이었다는 것이 개항의 충격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중국상인이나 일본상인을 통해서 영국산 면제품이 수입되었지만, 1880년대 말부터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일본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일본산 면제품 비중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수입 면제품 중에 품질이 고급인 금건(金巾)은 중류층 이상인 사람들에게만 소비되었고, 품질이 거칠었던 시팅(sheeting)도 우리나라 재래의 ‘토포’(土布)가 경쟁할 수 있었다. 재래직기(베틀)로 직조한 토포는 시팅보다 비쌌지만 두텁고 질겨서 내구성이 좋았기 때문에 일하는 일반 서민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그림 1). 이것도 잠시, 일본에서 ‘시팅’을 개량하여 토포와 흡사한 면포를 생산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경쟁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재래 면업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수입 면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역직기(power loom)를 사용하는 근대적 공장을 설립하거나(그림 2) 적어도 바탄기, 족답기와 같은 개량 직기라도 도입하여야만 했다. 족답기만 하더라도 베틀보다 생산성이 3~4배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도 면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885년에 직조국(織造局)을 설치하여 중국으로부터 기술자와 직기를 도입하려고 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2개의 직물회사가 설립된 것이 확인되지만 3개사만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었을 뿐이고 동력을 사용한 회사도 한 곳뿐이었다. 무엇보다 면공업의 기초가 되는 면사를 생산하는 면방적회사가 설립되지 못하였다. 근대적 면공업 성립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공장제 면제품 수입으로 면업 쇠퇴
면제품을 비롯한 외국산 수입품이 급속히 증가하였던 것은 우리나라 상품이 외국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출품에는 쌀과 콩이 가장 많아서 1887년에 총수출의 52.9%를 차지하더니 1890년에는 최고 85.
7%로 급증한 후에 1910년까지 줄곧 60~70%대를 유지하였다. 수입하는 일본상인 입장에서 운임이나 제반 비용을 빼고도 양국 간 가격차로부터 이익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1880년대 말까지는 쌀수출이 쌀수입보다 많았다. 한국산 쌀을 수입한 것은 비싼 자국산 쌀은 수출하고 저렴한 쌀을 수입하여 도시 노동자의 수요증가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1885년에서 1994년 사이에 일본에 수출된 쌀은 590만?에서 2만3000?으로 증가하였으며, 콩은 1681?에서 1만6000?으로 증가하였다. 개항 당시 우리나라 쌀값은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무역으로 양국의 시장이 통합되기 시작하자 급속히 차이를 좁혀갔다.이로 인한 물가상승은 식량을 구입해야 하였던 임금소득자나 빈농의 생활에 타격을 가하였다. 나아가 면제품 수입과 맞물려 우리나라 산업구조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수입산 면제품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면화 재배나토포 생산을 줄여나가는 한편, 쌀과 콩 생산에 더 많은 노동과 자원을 투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부터 대표적인 상품작물이었던 쌀 생산이 늘어나고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일본 볍씨가 도입되었다. 별로 판로가 없었던 콩도 면화밭을 콩밭으로 바꾸고 논두렁에도 콩을 심을 정도로 변화가 일어났다. 개항 이후 1890년을 전후하여 하락하던 토지 생산성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이러한 시장조건의 변화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쌀과 콩, 일본으로 수출 급증
개항 후에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공장제 면직물이 수입되면서 재래 면업이 쇠퇴한 것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은 중국과 일본은 생사(生絲)와 차를 수출하였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였고 쌀, 콩과 같은 곡물을 수출하였다는 점이다. 차 수출을 못한 것은 기후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누에고치에서 뽑아내는 생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고 있었음에도 개항 초기에 아주 소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을 뿐이었다(1883년 총수출의 1.7%). 개항기 내내 쌀과 콩 수출만으로는 국제수지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외결제를 위해서 금과 은이 유출되고 있었다. 생사가 수출되었다면 귀금속의 유출을 막고 외화를 획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생사 수출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생산량이 적었고 수출할 만한 품질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880년대에 우리나라의 생사 연간 생산량이10만㎏에 불과하였는데 중국과 일본은 수출액만 각각 400만㎏, 100만㎏에 달하였다. 비단 생산의 원조격인 중국은 그만두고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 비단제품을 수입하였던 일본과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무역적자로 은 유출이 심해지자 중국산 비단 수입을 금지하고 자국산 비단 생산을 장려하였지만 조선왕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개항 전에 중국산 비단을 자국산 비단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에 성공하였고 개항 후에는 프랑스로부터 제사기계를 도입하여 1872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도미오카(富岡) 공장의 예와 같이 세계 생사시장에서 최고 수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뒤쫓고 있었다(그림2).
중국·일본과 달리 생사 수출 못해
우리나라에서도 ‘명주’라고 하는 국내산 견직물이 생산되었지만 궁중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고급 견직물은 조선시대 내내 중국산 비단이 수입되어 소비되었다.
시전 상인 중에 가장 세력이 컸던 ‘육의전’(육주비전)의우두머리가 입전(立廛·선전)이었는데, 중국산 비단을 독점적으로 수입하여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보유하고있었다. 국내 견직업을 보호하기는커녕 국가로부터 시전상인이 특권을 제공받아 중국산 고급 비단을 수입하는 상황에서 고급 견직물이 생산되기는 어려웠으며, 명주 생산에 요구되는 품질 이상으로 제사 기술을 발전시킬 인센티브도 생길 수 없었다.
개항 후에 우리나라 정부도 생사 수출의 중요성에 눈을 떠서 중국의 기술을 도입할 계획으로 1883년에 ‘양잠규칙’을 공포하고 1884년에는 독일인 메텐스(H.Maertens·麥登司)를 고용하여 ‘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1886년 봄에는 중국에서 뽕나무 30만~40만그루를 수입하기까지 하였지만 계획한 회사도 설립되지 못하고 생사 수출에도 실패하였다. 재정곤란이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뽕나무부터 수입해야 할만큼 국내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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