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미용프랜차이즈 만든 72세 현역 미용인 이가자
[ 강창동 기자 ]
“유럽에 비달 사순이 있다면 아시아엔 이가자가 있다.” 중국인들이 이가자 이가자헤어비스 원장(72)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그를 미용의 대가(大家) 또는 장인(匠人)이라고 부른다.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는 중국인들은 50여년간 미용인으로 연륜을 쌓아온 그에게 존경심을 표시한다. 나이가 들면 퇴물 취급하는 한국 미용계의 풍토와는 대조적이다.
그가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간 것은 2002년, 환갑 때였다. 가족은 물론 지인 모두가 말렸지만 그의 꿈을 접게 할 수는 없었다. 언어도, 아는 사람도, 삶의 터전도 없는 대륙에 그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베이징에는 이미 ‘비달 사순’ ‘토니 앤 가이’ 등 세계적인 헤어산업 브랜드들이 진출했다.
이들 브랜드와 경쟁하는 것은 다음 단계. 당장 본거지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다. 번화가인 왕푸징 인근 베이징호텔에 중국 1호점 문을 열었다. 귀부인이 하나둘씩 찾으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중국은 예로부터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해요. 미용업과 같은 대면 서비스야 말할 것도 없지요.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초반에 대박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요. 어차피 제2의 인생을 중국에 올인하기로 했기 때문에 급할 게 없었습니다.”
이 원장이 중국 미용업계와 연예계에 알려진 계기는 ‘홍루몽 선발대회’를 통해서였다. 한국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비슷한 대중 이벤트다. 여기서 뽑힌 미인들은 방송계나 연예계로 진출하곤 한다.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 홍루몽 선발대회에 참여하는 미인들의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2006~2007년 2년간 전담했다. 이후 중국 방송사 연예 프로그램 PD들이 잇따라 그를 찾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중국인들은 이 원장의 연륜을 높이 사 오랫동안 미용업계 현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은퇴’를 권고하는 한국의 지인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중국 진출 13년이 지나면서 그가 뿌린 씨앗은 상하이, 칭다오, 정저우 등 중국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다. 이가자헤어비스의 중국 가맹점은 최근 30개를 넘어섰다.
“중국에서는 미용사 자격증이 있어야만 미용실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본가들도 미용실에 투자합니다. 중국 미용실은 기업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용실들은 자체 아카데미를 갖추고 선진 미용 기법과 서비스를 도입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지요. 대략 10년 정도 지나면 중국 미용산업이 한국을 능가하게 될 겁니다. 자격증 없이는 미용실을 열 수도 없고 영세한 동네 미용실로 넘쳐나는 한국 미용업계의 현실이 답답하기 그지없죠.”
이 원장의 몸속에는 도전과 열정의 DNA가 녹아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시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을 등지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고 한다. 남편과 결혼한 뒤 남편 고향인 경기 용인에 비로소 정착했다. 이 원장의 어머니는 단순히 살림만 하는 평범한 주부가 아니었다. 손재주가 뛰어나 손수 재봉 일을 하고 우산과 양산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였다. 6·25전쟁 직후 어머니는 미장원 하나를 얻었다. 어머니는 자격증 빌린 값을 꼬박꼬박 물면서 무작정 미용실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딸들을 미용실 운영에 투입했다. 이 원장은 자연스레 미용업과 인연을 맺었고, 스무 살 때 언니와 함께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땄지만 한 10년간은 장롱 속에 묻혀 있었어요. 내가 원해서 딴 자격증이 아니어서 제 천직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하느라 자격증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요.”
미용에 대한 목마름이 일어난 것은 첫 아이를 낳은 스물일곱 살 때였다. 그는 첫 아이를 둘러업고 시댁이 있던 용인을 떠나 서울의 오빠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시부모님과 남편은 “미용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절규하는 이 원장을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장롱 면허’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용실을 열 수 없었다.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무엇보다 급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넘은 아이 엄마를 견습생으로 써주는 미용실은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오빠에게 75만원을 빌려 1972년 서울 청파동에 미용실을 열었다. 전문 미용사를 고용, 미용실을 경영하며 일도 배웠다.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손재주는 빛을 발했다. 그러나 동네 미용실로는 한계가 있었다.
“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했죠. 도쿄에 있는 미용 전문 아카데미였는데, 강의를 들으며 현장 실습도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이때 배운 게 두고두고 도움이 됐어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서교동에서 새로 문을 연 미용실에 ‘이가자미용실’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국내 최초로 실명제를 도입한 미용실이다. 1995년에는 이가자헤어비스 체인사업을 시작했다. 첫 미용 프랜차이즈였다. 이후 체인점은 국내 135개와 해외(중국, 미국, 호주) 41개로 늘어났다.
그의 사업 인생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외환위기 시절,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금융회사로부터 30억원을 대출받아, 실력 있는 수석 디자이너들에게 1인당 1억~2억원씩 무담보로 빌려줬다. 체인점을 넓혀가려는 분가 작업의 하나였지만 그해 12월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금융회사는 빚을 빨리 갚으라고 매일 독촉전화를 해댔다. 견디다 못한 그는 보유 부동산을 처분해 빚을 해결했다.
그의 미용 인생은 이제 50년을 훌쩍 넘겼다. 나이도 칠순을 넘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이 원장은 68세 때부터 연간 1회 정기적으로 영국 런던의 ‘비달 사순 아카데미’로 단기 연수를 받으러 간다. 들을 만큼 들은 강좌지만 갈 때마다 최신 미용 트렌드에 자극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원장이 요즘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것은 ‘세계 무대’다. 커트와 염색 기술이 전부인 서구 미용인들과 달리 파마, 메이크업, 네일아트까지 자유자재로 기술을 구사하는 한국인이야말로 세계 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K뷰티' 세계에 알린 1세대
1997년 美 LA에 해외 1호점
2006년 호주서 미용전문대학 설립
이가자헤어비스 해외 체인점 41개
이가자헤어비스는 1995년 프랜차이즈 가맹본부를 설립, 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2년 뒤인 199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해외 1호점 문을 열었다. 현재까지 미국에 14개 가맹점을 두고 있다.
이가자헤어비스는 2006년 호주 시드니에 ‘LKJ 헤어&뷰티 칼리지’를 열었다. 이가자 원장은 ‘이가자’ 브랜드를 아시아 미용의 대표주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권 국가에 아카데미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호주로 날아가 변호사들을 만났다. 호주의 이민법과 교육법이 개정돼 ‘헤어&뷰티 칼리지’를 설립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컨설팅 결과가 나왔다.
세심한 준비작업을 거쳐 시드니 중심가인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2년제 미용 전문 대학을 설립했다. 한국 브랜드를 내건 최초의 해외 미용전문대학이다. 2009년 12월까지 세계 20여개국, 150여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미용기술을 배웠다. 졸업생들은 모두 호주 영주권을 받아 현지에서 100% 취업했다. 2010년 호주 이민법이 개정돼 미용사의 영주권 취득이 제한되면서 휴교에 들어갔으나 미용사 수급 상황에 따라 다시 문을 열 가능성이 높다고 이 원장은 설명했다.
이 원장은 “호주에서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이 ‘K뷰티’를 세계 시장에 진출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제주도에 뷰티 칼리지나 아카데미를 설립,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을 교육해 한국 미용의 홍보대사로 활용하자고 그는 제안했다. 이 원장은 10년 안에 중국 뷰티산업이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중국에선 3300㎡ 이상 대형 미용실이 투자자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체 아카데미를 세워 기업화와 글로벌화를 강력 추진하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