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평화 촉구한 합동기도회 등
'진정한 용기' 보여온 교황 행보
죽음앞 순교자 용기 되새길 기회
이승하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 >
13세기 초에 교회 개혁운동을 이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너무나도 유명한 기도문을 만들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엔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엔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엔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엔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엔 희망을, 어둠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엔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하략) 흔히 ‘평화의 기도’라 불리는 기도문이다.
오는 14일 방한 예정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이란 권고문에다 이렇게 썼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랍니다.”(하략)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사상도 비슷하다. 특히 교황은 용기가 대단한 분이다. 얼마 전에는 미사에 앞서 마피아에 목숨을 잃은 3세 아이의 유가족을 만나 위로했다. 아이는 폭력조직 간 세력 다툼 과정에서 할아버지 등과 함께 살해당했는데 불탄 자동차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교황은 유가족에게 “죽은 아이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고 어린이들이 범죄조직에 희생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국제적인 마피아 조직 ‘은드란게타’에 파문을 선언했다. 교황의 용기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교황의 세례명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에 참전용사였으니 사람도 여럿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산다미아노 부속 성당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 개과천선해 자선과 청빈의 삶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부와 영예, 가족까지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다. 자신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바티칸 정원에서 열린 합동기도회에서 이스라엘 대통령,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를 비롯해 유대교·가톨릭·이슬람교 신자에게 전쟁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숨졌다며 중동 평화를 촉구했다. 어떤 정치지도자도 못했던 일을 교황이 한 것이다. 교황의 용기에 다시 한 번 감동한다.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지만 윤 일병 사망사건, 김해여고생 살인사건 때도 책임지는 용기와 반성하는 용기를 보여준 이가 있었던가. 그런 점에서 교황의 방한은 우리에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교황은 22개국 아시아 청년대표단 5000명과 만나고,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솔뫼마을에서 청년들과 문화프로그램을 함께한다.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집전하고, 음성꽃동네를 방문해 장애인과 평신도 대표들을 만난다. 해미성지에서 아시아주교단과 만나고, 명동성당에서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한다.
순교는 목숨을 버리면서 지켜낸 믿음이다.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집전하고 해미성지를 방문하는 일정을 짠 것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순교자들의 용기를 높이 기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자신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교황의 권위가 아닌 그의 용기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쓴 기도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평화의 기도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새롭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용기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싶다.
이승하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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