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이정현이 호남에 여당 깃발 꽂은 진짜 비결은

입력 2014-08-01 12:50

(은정진 정치부 기자) 새누리당 이정현 당선자가 호남(순천·곡성)에서 승리하면서 대한민국은 30일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야권 텃밭'인 호남에서 18년만에 여당 깃발을 꽂았습니다.

선거 당일까지도 이 당선자의 승리를 점친 정치 전문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이 당선자의 상승세가 뚜렷했지만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막상 투표일이 되면 순천·곡성 유권자들이 새누리당 후보에 표를 주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당선자의 선거 승리는 ‘대이변’이자 선거역사의 큰 사건입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강현욱 전 의원이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 후보로 전북 군산에서 53.8%의 득표율로 당선된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엔 한 번도 여당 후보가 호남에서 당선된 적이 없습니다.

영남에서야 부산 출신 야당 대통령도 나왔고 그 힘으로 야당 정치인이 3선도 하는 등 지역주의 구도가 어느 정도 깨지는 분위기지만 호남은 여당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철옹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남에서 거둔 오랜만의 승전보를 두고 언론에선 이 당선인이 내세운 지역일꾼론, 예산폭탄론 등이 순천 곡성 주민에게 먹혀들었다고 평가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순천대 의대 유치, 순천만 정원 국가정원화, 광양만 개발 등 낙후된 해당 지역을 완전히 바꿀 복안을 제시했던 것이 민심을 사로잡은 요인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승리엔 보이지 않는 요소가 많았습니다. 이른바 ‘디테일의 힘’이었죠. 이 당선자는 순천·곡성 출마를 선언하며 당 지도부의 선거현장 방문을 막고 나홀로 선거운동을 고집했습니다. 여당에 적대적인 새누리당 색을 빼고 오직 인물로만 승부하겠다는 의도였죠.

그 대표적 예는 선거 벽보와 현수막이었습니다. 그의 선거 벽보엔 새누리당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사라졌고 새누리당 마크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표시됐죠. 현수막도 빨간색 대신 중립을 의미하는 검정색과 회색을 넣어 여당 후보라는 이미지 대신 무소속 같은 지역 후보라는 점을 부각시켰죠. 누가 봐도 새누리당 후보임을 찾아보긴 힘들었습니다.

선거운동원 없이 자전거 한 대로 곳곳을 누빈 행보에 대해서 일각에선 ‘정치 쇼’로 봤지만 현장에선 나름대로 의미있게 먹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난달 22일 기자가 현장에 가서 보니 대통령 측근 실세가 까맣게 탄 채 자전거 한 대로 시장을 누비며 한 표를 읍소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기던 시민들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습니다.

심리학에서 쓰는 ‘각인효과’도 적절히 이용했습니다. 이 당선자는 매일 매시간 순천 아랫장에 나타나 같은 어조와 같은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과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순천대에 의대를 유치하겠다’는 말도 한 번 들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매일 들으면 마치 ‘저 후보가 그것을 꼭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게 각인효과입니다.

특히나 대통령 홍보수석 시절 원고만 읽는 줄만 알았던 이 당선자가 알고 보니 즉흥연설의 대가였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30분 동안 즉석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알고 보니 어릴 적부터 웅변을 한 타고난 연설가었다네요.

일각에선 야권 후보간 분열로 얻은 ‘어부지리의 승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순천만 정원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당시 노관규 시장의 사업 추진에 제동을 건 사람이 서갑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였습니다. 서 후보가 2011년 1월 순천 곡성에서 의원직을 상실하자 노 전 시장은 1년반짜리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노 전 시장은 이번 재보선에 다시 도전했지만 다시 서 후보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노 전 시장 지지자들은 단순기권으로 끝나지 않고 역으로 이정현 적극지지자로 돌아섰다는 게 지역 민심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순천의 최대 사업이었던 정원박람회에 반대한 서갑원을 응징하고, 순천 정원박람회장을 국가정원으로 지정하겠다는 이 후보의 주된 선거전략은 그를 2년짜리 여당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자는 여론 광풍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여당 심판론이 아니라 오히려 야당 심판론을 활용한 겁니다.

이 당선자가 보낸 감성적인 메시지도 선거에서 유효했다는 평가입니다. 암투병 중인 아내가 선거를 돕는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애잔하게 그를 보는 시민들이 많았답니다. 특히나 그가 곡성 순천 주민들에게 보낸 선거 문자메시지는 선거 후 화제가 됐습니다. 그가 순천·곡성 시민들에게 보내 눈시울을 적신 서정시보다 애잔한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딸 소정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 준비물값 2000원!’ 하고 손을 내미는데 제 주머니에 그 2000원이 없어 엄마한테 달래라 하고는 집을 나와 봉천동에서 여의도까지 걸어서 출근하면서 많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고2 어느 가을날 새벽 2시 자다가 인기척에 깨어보니 어머니는 달빛 아래 마당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낮에 타작하다 마당 흙 속에 박힌 콩을 줍고 계셨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너희 형제들 학비를 대제!’ 라는 말씀을 듣고 그날 저녁 베개가 다 젖도록 울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강연이나 연설 때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어머니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목이 잠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뼛속까지 비주류입니다. 비주류의 심정을 잘 압니다. 비주류를 대변하겠습니다. 저 일하고 싶습니다. 꼭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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