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보다 독한 '영업맨 투지'로 난공불락 거래처 뚫었죠"
가난 벗어나려고 시작한 권투
프로선 3連敗 후 자살까지 생각…싸움권투 버리고 17연승 달려
은퇴후 커피전문점 운영하다 김병태 회장 만나 전직 결심
영업맨의 무기는 '진정성'…원장실 앞 8시간 기다리기도
회사 목표액 2배 이상씩 달성
[ 김형호 기자 ]
1994년 9월18일.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밴텀급 도전전이 일본에서 열린 날이었다. 일본에서 ‘천재 복서’로 불리던 챔피언 오니즈카 가쓰야가 이날 한국 이형철 선수의 라이트훅을 맞아 9라운드에서 무너졌다. 서울 성수동 판자촌 사고뭉치였던 이형철은 세계챔피언 벨트를 거머쥐며 “이제 지긋지긋한 가난은 끝났다”고 속으로 외쳤다.
당시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형철 한올바이오파마 부장(45)은 “당시엔 권투가 인기가 좋을 때였다”며 “챔피언만 되면 부와 명예를 얻고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타이틀을 딴 뒤 벌어진 일 때문에 그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가난이 싫어 시작한 권투
전북 김제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던 부친이 노름에 손을 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 부장이 여섯 살 때 여섯 식구가 야반도주하다시피 상경해 자리를 잡은 곳이 서울 성수동 판자촌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말썽꾸러기였다. “키는 작았지만 싸움박질을 곧잘 했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싸움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버지와 공장에 나가던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거의 매일 싸웠다. “육성회비 안 낸다고 매달 학교에서 혼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가족을 그런 처지로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가난이 너무 싫었어요.”
철이 들 즈음 그의 관심은 ‘무엇을 하면 집안을 일으켜세울 수 있을까’였다. 신문배달을 하던 어느 날 열다섯 살이던 그의 눈에 권투체육관이 들어왔다.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받아달라고 사정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입관비 2만원을 낼 돈이 없어서였다.
“한 체육관에서 3라운드를 버티면 입관비 없이 받아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상대가 나보다 어린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는 이날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훗날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고(故) 최요삼 선수가 그날 싸운 상대였다. ‘깡’으로 3라운드를 버텨낸 덕분에 입관비 없이 권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프로 데뷔와 좌절, 자살시도
빨리 성공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급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시민대회 준결승까지 갔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 가능성을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로 데뷔를 결심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달랐다. 데뷔 후 연거푸 졌다. 주변에서 “이형철은 연습용”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부산에서 가진 세 번째 경기에서마저 패하자 그는 희망을 버렸다.
“프로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갔어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그때는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라고 쓰인 팻말이 있었습니다. 낭떠러지 위에서 발을 굴러 뛰어내리려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며 발길을 돌렸다. 여관방에서 ‘깡소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손가락에서 거머리가 나오는 악몽 끝에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묘하게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힘과 펀치력만 믿고 한방에 보내겠다는 싸움식 권투를 했던 거예요. 한마디로 상대에 대한 전략이 없었던 거죠.” 이후 그는 상대 스타일에 따라 인파이팅과 아웃복싱을 섞어서 대응하는 권투를 하기 시작했다.
챔프의 영광은 한순간
그날 이후 이형철은 세계 타이틀매치 1차 방어전까지 17연승을 달렸다. 마지막 시합이 된 1996년 2차 방어전은 그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시합이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시합에서 그는 공이 울린 뒤 도전자에게 가격을 당했다. 무효타인 데다 타격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링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챔피언 타이틀만 따면 아파트도 한 채 사주고 대전료도 넉넉하게 주겠다는 약속들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차 타이틀 방어 후 은퇴하겠다고 했는데 스폰서 측에서 방어전을 한 번 더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에 바닥에 누워 심판의 카운트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어요.”
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2차 방어전에 앞서 돌아가신 것도 충격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가족을 가난의 수렁에 빠뜨린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는데 암에 걸려 왜소해진 모습을 보니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권투로 성공해 조그마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주려고 했는데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진정성으로 마음을 움직여라
권투를 그만둔 나이가 스물여섯. 일단 사람들과 융화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보자는 마음에 서울 왕십리에 커피전문점을 차렸다. 권투챔피언 출신이 하는 커피전문점인 데다 운동하며 배운 스포츠마사지로 주변 상인들의 어깨 피로를 풀어주는 친화력에 금세 입소문이 났다. 덕분에 매출이 쑥쑥 올랐다.
서울 구의동에 커피전문점을 또 하나 차렸다. 이때 커피가게에 자주 들르던 김병태 한올바이오파마 회장과의 만남이 제약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됐다. ‘젊은 챔피언 출신이 왜 커피 장사를 하냐’며 관심을 보이던 김 회장이 “자네, 영업해볼 생각은 없나”고 제안했다.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에 원서를 냈지요. 그때가 1998년인데 외환위기 직후라 경쟁률이 88 대 1에 달했습니다. 15명 뽑는데 최종 합격을 한 겁니다.”
이 부장은 입사 후 영업실적에서 1등을 도맡아왔다. 항생제 수액제 등을 병원에 공급하는 이 부장은 매달 회사가 제시한 목표액의 두 배 가까운 실적을 거둬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다. 사내 기록을 갈아치우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입사 10년 만인 2008년 부장을 달았다.
“커피가게를 할 때 제가 물건을 구입하는 기준은 영업사원의 진실성이었습니다. 급할 때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영업사원의 물건은 다소 비싸더라도 사게 됩니다. 그런 진정성으로 병원을 공략했습니다. ”
‘위기는 기회, 다시 일어서는 삶’
내로라하는 영업사원 수십명이 뚫지 못한 거래처를 확보했을 때 세계타이틀을 따낸 것 못지않은 희열을 느꼈다. “병원에 방문하면 원장을 못 만나고 허탕을 칠 때가 대부분이에요. 하루는 작심하고 찾아가 8시간 동안 원장실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독하다’며 저녁 때 원장이 불러 제품 리스트를 달라는 겁니다. ‘약에 대해 알아보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40개 품목을 체크해서 당장 다음날부터 납품하라는 거예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성사시켰다는 희열에 짜릿했죠.”
이 부장은 제약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 인생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병원 원장의 소개로 만난 아내는 대학 간호학 전공을 살려 이 부장의 ‘과외선생님’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집사람은 새로운 약이 나오면 공부를 도와주는 선생님이자 제가 밖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자입니다. 제약사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삶을 누리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생에 사이클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위기가 오는데, 그 슬럼프를 극복하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 다시 일어서는 삶’이 제 인생의 슬로건입니다.”
■ 제약사 영업맨의 세계
어려운 의학용어 ‘첫 관문’…실적 따라 동기도 연봉 2000만원 차이
제약사 영업은 자동차·보험 영업과 함께 ‘3대 영업’으로 꼽힌다. 불특정 다수의 신규 고객을 확보해야 하는 자동차·보험과 달리 자신의 담당 병원에서 실적이 갈리는 게 차이점이다.
국내 제약사는 대부분 정기공채를 통해 영업사원을 선발하는 반면 다국적 제약사들은 국내 회사에서 영업력을 검증받은 경력직을 선호하는 편이다. 신입사원의 첫 고비는 입사 후 생전 처음 듣게 되는 생경한 의학용어들이다. 성분에 따라 ‘실데나필’ ‘타다다필’ ‘유데나필’로 분류되는 발기부전 치료제처럼 완제 의약품의 성분은 같은 치료제라도 제각기 다르다. 이 때문에 각종 의약품 성분과 약효를 숙지하는 게 1차 관문이다. 교육 후 매번 실시하는 시험이 신입사원들에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다. 중학교 때부터 권투에만 매달린 이형철 한올바이오파마 부장도 입사 후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의학용어 숙지를 꼽았다.
최소 한 달에서 석 달가량의 사전 교육을 거쳐 일선 영업현장에 투입된다. 대부분 회사가 신입사원에게는 동네의원급부터 맡긴다. 영업 능력에 따라 100병상 이상의 준종합병원, 종합병원으로 올라가는 승격 구조다.
영업사원의 실력에 따라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게 성과급이다. 성과급은 분기별로 실적을 확인해 지급하는데 한꺼번에 500만~600만원을 받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한푼도 못 받는 영업맨도 적지 않을 정도로 편차가 심하다. 사내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이 부장의 경우 급여 외에 연간 2000만원 안팎의 성과급을 별도로 받았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영업 ‘필살기’는 입사 동기에게도 비밀이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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