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內戰의 '오발탄 참사'…親러 반군이 요격한 듯

입력 2014-07-18 21:20
수정 2014-07-19 04:02
말레이시아 여객기 미사일 피격 추락

반군은 "정부군 소행" 주장…美 "러製 미사일이 격추시켜"

희생자 154명 네덜란드인
우크라 긴장 수위 '최고조'…유엔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


[ 양준영 기자 ]
‘러시아 국경에서 약 50㎞ 떨어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그라보보 마을. 미사일 공격을 받아 추락한 말레이시아항공 보잉777 여객기(편명 MH17)는 검게 불타 산산조각 난 채로 흩어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 수십 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객기 잔해와 시신 일부는 수㎞ 떨어진 지역에서도 발견됐다.’

AFP통신 등 외신들이 17일(현지시간) 전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미사일 피격 추락현장의 참혹한 모습이다. 이 사고로 승객 283명과 승무원 15명 등 탑승자 298명은 전원 사망했다. 민간 여객기가 격추돼 발생한 사망자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친러시아 반군이 책임 소재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반군에 의한 미사일 공격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격화되는 책임 공방

우크라이나 정부는 반군이 쏜 러시아제 지대공 미사일 공격으로 여객기가 추락했다며 이를 뒷받침하는 도청자료 2건을 공개했다. 분리주의 반군 소속 대원과 러시아 정보장교 등이 미사일 공격에 대해 대화하는 내용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보실은 “정부군은 공중 목표물을 향해 어떤 공격도 하지 않았다”며 반군에 혐의를 돌렸다. 반군이 여객기를 우크라이나 정부군 수송기로 오인해 격추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반군은 지난달에도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AN-26 수송기를 격추시킨 적이 있다.

미국 정보당국도 여객기를 추락시킨 미사일이 러시아제라고 결론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제 이동식 중거리 방공시스템인 ‘부크(Buk)’ 미사일을 지목하고 있지만 미 정부는 신중한 입장이다. 부크는 트럭에 실어 이동하는 구형 미사일로, 최대 고도 25㎞에 있는 목표물까지 격추할 수 있다. 여객기는 격추 당시 순항고도 10㎞에서 운항 중이었다.

반군 측은 오히려 정부군 소행이라고 반박했다. 반군이 세운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알렉산드르 보로다이 총리는 “우리에겐 10㎞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를 격추할 만한 무기가 없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여객기 추락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우크라이나에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일각에선 당초 표적이 37분의 시차를 두고 인근 지역을 비행한 푸틴 대통령 전용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했다.

○비탄에 잠긴 지구촌

사고 희생자의 절반이 넘는 154명이 네덜란드인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여객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던 중이었다. 말레이시아인 43명(승무원 15명 포함). 호주인 27명, 인도네시아인 12명을 비롯해 영국인 9명, 독일인과 벨기에인 각각 4명, 필리핀인 3명과 캐나다인 1명이 탑승한 것으로 확인됐다.

승객 41명은 국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국인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인 탑승객은 없는 것으로 잠정 확인됐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네덜란드 역사상 최악의 항공 재난”이라며 정부기관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토니 애벗 호주 총리는 18일 “형언하기도 어려운 범죄”라고 비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끔찍한 비극”이라며 사건 규명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날 오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긴장 수위 높아지는 우크라이나

꼬여가던 우크라이나 사태는 해결 가능성이 더욱 불투명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친러 반군의 무력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여객기 격추라는 최악의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번 여객기 격추가 반군 세력에 의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우크라이나 사태의 중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포기하고 사태 해결에 나서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말레이시아 항공기 추락의 책임이 러시아에 있다는 게 밝혀지면 푸틴 대통령은 국제적 ‘왕따’가 될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