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고 싶었습니다
40년 칸트 연구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모든 걸 이익으로 계산하는 공리적 가치관 팽배
인간의 존엄성은 교환가치 성립 안되는 '대체불가'에 있어
행복추구가 도덕과 충돌할 땐 피해야
부익부 빈익빈? 얼토당토 않은 얘기…굶어죽는 사람 없어
다른 사람은 5배 부자 됐는데 나는 2배 부자 됐을 뿐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참는다는 심보 고쳐야
철학은 인문학의 본령이다. 인간의 삶과 가치에 관해 캐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중국의 공자 이후 동서양 철학자들은 ‘인간답게 살라’고 외쳤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인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더 파고들었다. 사람이 무엇을 알 수 있고(순수이성비판),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실천이성비판),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이성 안에서의 종교), 아름다움의 기준(판단력비판), 인류의 평화(영구평화론)가 그가 깨달은 주제였다. 칸트를 모르고선 철학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40년간 칸트를 연구해온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64). 그는 칸트가 강조한 인간 존엄성을 통해 인문학이 갈 길을 제시한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백 교수를 지난 14일 오후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만났다. 4시간 동안 걷고 차를 마시며 칸트가 던진 논제를 중심으로 대화했다.
▷숲이 울창한데 여기를 자주 걷나요.
“개포동에 사는데 보통은 탄천 쪽으로 걸어요. 가끔 많이 걷고 싶을 때 집사람이랑 이쪽으로 오죠.”
▷매일 오후 5시 똑같은 시간에 산책했던 칸트처럼 규칙적으로 합니까.
“저는 정해진 시간에 걷지는 않고요. 농번기에는 경기 양평의 중미산에 사놓은 텃밭에 농사 지으러 가죠. 저 같은 책상물림 학자는 근육이 퇴화하니까 운동을 안 하려면 노동이라도 하는 게 낫죠. (웃음)”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가봤나요.
“4년 전에 처음 가봤습니다. 칸트가 살 때는 프로이센의 옛 수도였는데 제가 공부한 1980년대에는 소련 땅이었죠. 1990년 러시아로 바뀐 뒤로 통행이 자유로워졌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데 러시아 본토 하고는 떨어진 육지의 섬입니다. 지금도 러시아 잠수함 부대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예요.”
▷칸트가 걸었던 공원은.
“당시에는 한적하고 개천도 좋아서 걸을 만했겠죠. 지금은 번잡해서 여기(시민의 숲)가 훨씬 나아요. (웃음)”
▷칸트의 책은 왜 어렵나요.
“철학책은 소설이 아닙니다. 혼자 삼국지 읽듯이 하면 안 되죠. 기계도 부속품을 알아야 하듯이 철학도 몇 년간 수학 물리학처럼 연구해서 읽어야 해요. 말 하나 하나가 어렵죠. 칸트의 책이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책을 읽듯이 근대 철학책을 읽을 수는 없어요. 지금 그리스 철학책과 논어를 읽으면 이해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겠죠. 근대 이후 철학은 개념에 의한 이성 지식의 체계입니다. 문화가 더 진행되면 지금의 철학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은 왜 필요한가요.
“사람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게 아니죠. 사랑이 눈에 보입니까? 사랑을 설명해야 할 거 아닙니까.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요. 자동차만 있으면 되나요. 인간 세계 중에서 그런 수단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세계를 철학이 들어가는 겁니다.”
▷요즘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관심을 받으니까 어떤 면에서 호황을 맞았죠. 하지만 잘나갈 때 조심해야죠. 인문학의 본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인문학의 목적은 인간됨의 배양입니다. 이익 창출과 반대되죠. 사장님들이 인문학을 공부해서 회사 경영에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잘못된 겁니다.”
▷경영에 도움이 안 되나요.
“회사에서 100명을 뽑는데 경영학과 출신을 95명 뽑고 나머지 5명을 인문학도로 끼워 넣으라고 저는 얘기합니다. 인문학적인 생각을 하면 이익 창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 텐데 그건 아닙니다. 인문학은 경영학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경영학도는 이익 창출에 목표를 두죠. 인문학도는 이익 창출이 인간됨에 보탬이 되느냐를 다시 한번 반성하라고 옆에서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인문학을 배워야 합니까.
“인간답게 살아야 하니까요. 두 번 살다가 죽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돈 버는 걸 안 좋다고 보나요.
“안 좋은 게 아니라 경제·경영학자는 경쟁 효용을 주창하지만 인문학자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라며 딴죽을 거는 거죠. 인문학자는 또 다른 경제학자이거나 경제학자의 보조 수단이 아닙니다. 경제활동을 추구하다 보면 누군가의 권익이나 인간다움을 해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중단해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충돌이 없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하라는 겁니다.”
▷모두에게 인격적 대우를 하라는 얘기입니까.
“저는 30년 넘게 아침 식사를 직접 챙겨 먹습니다. 여권(女權)이라는 면에서 집사람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싶으니까요. 행동 하나 하나를 배려하는 게 인문 정신입니다. 인문학이 처세나 출세를 위한 장식품이 돼서는 안 됩니다.”
▷경쟁은 사회를 진화시키지 않나요.
“상대를 북돋우는 경쟁이 있고, 상대를 파괴하는 경쟁이 있죠. 뭐든 적당하면 좋은데 지나치면 안 좋죠.”
▷원래 인간 됨됨이가 된 사람은 인문학 공부를 안 해도 됩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사람은 태어날 때 다 짐승으로 태어났는데요. 선의 씨앗을 물과 거름을 주면서 가꿔야 합니다.”
▷인문학과 출신은 취직하기 힘든데.
“공자가 어디 취직했나요. 사숙(私塾)을 열었죠. 칸트도 마흔한 살에 도서관 부사서로 취직해 처음 봉급을 받았어요. 46세에 가까스로 교수가 됐죠. 인문학은 직업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 취직이 안 되는 겁니다.”
▷칸트는 어떤 인물인가요.
“한마디로 수분(守分·분수를 지킴)을 실행한 철학자죠. 요즘 제가 칸트가 정말 그리운데요. 그는 분수를 지키는 것, 즉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연에 외경감을 갖고, 인간에겐 존경심을 가졌죠. ‘내 위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엔 도덕법칙(실천이성비판 맺음말)’이란 말에는 법칙으로 움직이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아름다운 숭고함,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죠. 죽기 전전날에도 의사가 오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맞이했어요. ‘나를 치료하기 위해서 왔는데’라며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겁니다.”
▷칸트의 철학을 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나요.
“객관주의 시대가 주관주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돈다고 했죠. 칸트 이전에는 이 탁자 같은 것을(탁자를 가리키며) 존재자라고 했어요. 대상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대상은 주관을 전제로 한 말이죠. 옛날에는 객체가 중심이었어요. 근대에는 주체가 중심입니다.”
▷칸트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요.
“고대와 중세 이론은 다 존재자를 전제로 했죠. 어려운 얘기인데 칸트는 존재자를 주관이 규정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우리는 사물이 언제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요. 사물 자체가 언제 어디에 있는 줄 모르는데 인간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주어와 술어관계로 생각해요. 이 책상은 딱딱하다, 이것도 사고 틀입니다. 이 틀로 세상을 읽는 겁니다. 자연 자체는 B, O, O, K만 있는데 인간이 그걸 조합하면 BOOK(책)의 의미가 들어와요. 자연 자체가 그런지는 몰라요.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죠. 칸트는 자연 자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죠.”
▷실생활이 달라졌나요.
“칸트 이전에는 신의 존재 유무를 놓고 싸웠죠. 칸트는 신이 ‘있다, 없다’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존재는 공간, 시간에 제약을 받는 말입니다. 철수가 없다는 말은 있다를 전제로 한 말이죠. 신에게는 그런 말을 쓸 수 없다는 거죠. 신이 없다는 말에도 칸트는 웃죠.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부질없는 형이상학적 의제를 해소한 거죠.”
▷큰 영향을 미쳤네요.
“칸트 이후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이 다 없어졌죠.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교회가 무너지죠. 그래서 칸트는 계시 종교는 허당이라면서 이성 종교를 세웠죠. 바로 희망의 종교죠. 하느님이 있다고 증명할 수는 없는 대신 하느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랄 수는 있죠.”
▷칸트 철학이 21세기에 던지는 의미는.
“철학이 하는 일은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현재 21세기 상황을 보면 모든 걸 이익으로 계산해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가치관과 모든 걸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물리주의적 세계관이 팽배합니다. 인간 존엄성은 대체 불가능성에 있어요. 이 컵(컵을 가리키며)도 가치가 있어요. 1개를 깨뜨리고 사장에게 10개 사준다고 하면 좋아하겠지요. 하지만 사람을 죽여놓고 ‘더 좋은 사람을 낳아줄게’ 하면 성립이 안 됩니다. 칸트 철학의 핵심은 인간 존엄성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게 나쁜가요.
“행복 추구가 도덕과 충돌할 때는 피해야죠. 예컨대 내가 감을 먹든 떡을 먹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의 감을 따먹으면 안 되죠. 행복이 최고 가치라면 다른 것이 종속됩니다. 행복하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도덕 가치가 행복 위에 있다는 겁니다. 공리주의에서는 이성이 행복 추구의 보조 수단이지만 칸트 철학에서는 이성이 욕구를 지배하고 제어합니다.”
▷다들 행복을 추구하는데.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것도 행복주의 풍조 때문입니다. 행복에 최고 가치를 두니까 불행한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김구 선생이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총 맞아 돌아가셨어요. 이순신 장군이 행복에 목표를 두고 살았습니까? 얼마나 인간되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요.”
▷어떤 이는 정신적 행복도 강조하는데.
“다 쓸데 없는 소리예요.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자가 아니고 신체적인 존재자입니다. 행복이라는 게 물질적인 충족이 없으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이 무슨 천사예요? 칸트는 신체적인 욕구 충족 없이 이뤄지는 정복(淨福)과 인간의 행복을 구분했죠. 정복은 하느님이나 천사가 누리는 겁니다.”
▷양극화에 대해선.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데, 세상에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고요? 절대 더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사람은 5배 부자되는데, 나는 2배 부자만 됐을 뿐이에요. 저 어렸을 때엔 진짜 많이 굶었어요. 요즘 굶어 죽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는 심보를 바꿔야 합니다. 물론 절대빈곤자는 사회가 돌봐야 합니다.”
▷칸트는 ‘국가권력 아래서 돈의 힘만큼 믿을 만한 것은 없다’고 했는데.
“국제 자본이 한국에 투자할 경우 한국에 전쟁이 나면 회수할 수 없으니까 상업자본이 국가 권력에 맞서 전쟁이 못나게 하는 뜻밖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입니다.”
■ 칸트의 삶
몸 쇠약했던 칸트, 섭생술로 80세까지 장수
젊었을 땐 내기당구로 생활비 벌기도
규칙적이고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을 우리는 ‘칸트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젊은 시절 내기 당구로 생활비를 벌 만큼 가난했다.
너무 어려운 철학책을 펴내는 바람에 처음엔 독일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4시45분이면 일어나 홍차 한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나 코 담배(코에 대고 냄새 맡기)를 피웠다. 대학 강의 후 오후에는 집에서 친구들과 약간의 포도주를 곁들이며 하루에 한 번 식사를 했다. 오후 5시엔 집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이 길은 나중에 ‘철학자의 길’로 불렸다. 산책한 다음 집에서 책을 다시 읽다가 밤 10시에 잠에 들었다.
유난히 몸이 쇠약했던 칸트는 섭생법을 통해 평균수명 50세 시대에 80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고 백종현 교수는 설명했다.
▷칸트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철저했나요.
“집에서 공부할 때 책상에 한 번 앉으면 몰두하니까 라틴어 사전을 일부러 방 구석에 놓고 사전을 볼 때마다 걸어 다녔죠. 실내에서 조금이라도 걸으려는 노력에 경탄할 뿐입니다.”
▷왜 결혼을 안 했나요.
“가난해서 못했죠. 그 당시 결혼 안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평균수명이 50세 전후인데 46세에 제대로 취직했으니 결혼 적령기를 놓쳤지요. 혼담이 세 번 오갔다고 하는데 제 짐작으로는 중인 출신임에도 주로 만나는 사람이 귀족들이라 머릿속에는 귀족 딸을 생각했을 것 같은데 소개받은 여자의 수준이 안 맞았겠죠. 당시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결혼을 안 했죠. 그리고 칸트는 몸이 전반적으로 약했어요. ‘칸트는 아플락 말락 했지만 결코 아프지 않았다’는 독일어 표현이 회자되고 있죠. 본인이 굉장히 섭생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까.
“61세에 집을 사서 2년간 가구를 들여놓을 돈을 모은 뒤 63세에 입주했죠. 집이 생기니까 친구들도 식탁에 부르고 산책할 여유가 생겼겠죠. 산책은 1시간 정도 했는데 쾨니히스베르크가 위도가 높아 해가 짧아요. 겨울에는 해가 더 짧고 추운데도 두꺼운 옷과 모자를 쓰고 외출했다고 합니다.”
풍문에 따르면 칸트는 평생 산책길을 딱 두 번 바꿨다고 한다.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일찍 손에 넣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얻으러 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그는 땀이 몇 방울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그늘에서 걸음을 멈췄다.
■ 백종현 교수는…
1950년 전북 부안 출생. 전주고 졸업.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한국칸트학회장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장을 지냄.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장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칸트가 평생 연구를 통해 펴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 ‘3대 비판서’를 비롯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윤리형이상학’ ‘형이상학 서설’ ‘영원한 평화’ 등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정구학 편집국 부국장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