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제재 해제 요구…거절땐 도발 명분쌓기
"동북아 정세 급변에 北 몸값 높이기" 분석도
[ 전예진 기자 ]
북한이 잇달아 군사 위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 공세를 펴고 있다.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북한이 전통적으로 구사하는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이다. 북·일 납치 문제 합의로 자신감을 얻은 북한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요구사항만 담긴 평화공세
7일 북한은 우리 측에 남북관계 개선과 대북정책 수정을 제안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성명은 북한이 대외 정책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최고 수준의 형식으로 대남 문제에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위 있는 수단을 활용해 성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한 실천 의지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 직전 서명한 남북관계 문건인 ‘7·7 통일문건’ 작성 20주년을 맞아 이번 성명을 발표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북남이 무모한 적대와 대결 상태를 끝장내고 화해와 단합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성명서에는 우리 측에 대한 요구사항만 담겼다. 남한 정부가 ‘동족 대결정책’을 ‘연북(聯北) 화해정책’으로 바꿀 대용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요구 내용은 △북침 전쟁연습 전면 중지 △공화국의 핵무력 인정 △남북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조치 해제 △연방연합제 방식의 통일 등 크게 네 가지다.
북한은 8월 예정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염두에 둔 듯 “동족에 대한 적대시 정책의 집중적 산물인 외세와 야합한 각종 북침 전쟁연습을 전면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핵무력은 외세의 침략 야망을 억제하고 평화와 안전, 번영을 위한 확고한 담보”라며 핵포기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신뢰 프로세스니, 드레스덴 선언이니 하는 허울을 쓰고 제도통일, 흡수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또 남북교류를 명분으로 우회적으로 5·24 조치 해제를 요구했다. 북한이 최근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풀기 위해 납치자 재조사에 합의하고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볼 때, 이번 성명의 목적이 경제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세 급변 틈타 도발 명분 쌓기
북한이 이런 성명을 낸 것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를 기회로 몸값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이 성명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대아시아 전략으로 새로운 냉전구도가 형성되고 있어 동북아시아 지역 정세는 복잡다단하다”고 언급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한 데다 중국과 패권 다툼으로 ‘주적’인 미국의 위치가 흔들리면서 자신감이 붙은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일 방한 때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한 것도 한몫했다. 한 대북 전문가는 “경제, 안보 분야에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고 제안이 거절당했을 때는 도발 명분을 쌓을 수 있다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의도 통일부 대변인은 북한의 성명에 대해 “남북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이번 성명처럼 일방적인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로는 어떠한 문제도 풀어 나갈 수 없다”며 “비합리적 주장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대화의 장에 조속히 나와야 한다”고 반박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