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0) 조선후기 시장경제의 발전과 한계

입력 2014-07-04 18:11

조선 전기에는 시장경제의 비중이 매우 낮았다. 건국 초기 국가정책에 의해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하여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농민들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장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 활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 생산에 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에도 궁궐 앞 대로에 시전(市廛)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16세기 후반에 사헌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따르면, 1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시전을 이용한 횟수는 70여회에 불과하였다. 우선 녹봉과 관료에게 배정한 공노비와 호위병,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바치는 공물이 있어서 시전을 이용할 필요가 적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물이었다. 유희춘은 66개월간 학연이나 혈연관계가 있거나 자신의 추천으로 지방관으로 나간 관료들로부터 무려 2796회, 한 달에 42회꼴로 선물을 받았다. 쌀과 같은 곡물부터 시작하여 면포, 부채, 종이, 붓, 먹과 같은 문방구, 꿩, 생선, 전복, 소금, 감, 유자, 감자, 생강, 마늘, 인삼, 꿀과 같은 수산물, 과일, 약재는 물론이고 장작과 숯과 같은 땔감까지도 선물로 확보하였다. 공물과 선물로 물자를 확보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전을 거의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시장경제 점차 발전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시장경제의 비중은 높아진다. 전쟁의 충격으로 농촌을 떠난 인구가 많아졌으며, 1608년 이후 점차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되어 국가에 집중된 미곡이 대량으로 공인을 통해 방출됨으로써 상업 발달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1678년에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전국적으로 통용되어 거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성이 증가해 잉여생산물의 공급이 늘어난 반면 소농경영의 성장과 노비제의 쇠퇴로 수요가 늘어난 것도 시장 경제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우선 농촌의 장시(場市)가 크게 증가하였다. 1470년경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라도 무안 등지에서 농민들이 성문 앞에서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가 되면 농촌 장시의 숫자가 전국에 1000개를 넘게 되었으며 5일마다 장이 서는 5일장 체제가 갖추어졌다. 장날이 서로 연계되어 농민들이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장이 주변 지역에 거의 매일 열리게 되었으며 이런 농촌 장시 망을 무대로 보부상(褓負商)이 활동하였다. 장시 숫자는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 1062개였는데 1911년의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도 1084개로 집계되어 장기간 그대로 유지되었다.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계층 분화가 생겨서 19세기 초에는 15개의 대(大) 장시가 성립해 있었다. 대 장시는 대개 감영과 포구가 있는 곳에서 열렸다. 특히 포구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교역되고 원거리의 물산이 모여서 거래되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물산이 집중되는 곳은 서울이었다.

한강 포구 경강상인 쌀값 좌우하기도

포구에서는 배를 가지고 영업하는 선상(船商)과 선상이 가져온 물건을 팔아주는 객주가 출현하였다. 객주는 ‘객상의 주인’(客商之主人) 곧 객지에서 온 상인의 일을 맡아서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위탁 판매의 대가로 판매액의 1/10을 구문(口文)으로 받았는데, 이외에도 숙박, 창고, 금융 등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포구 중에는 서울에 인접한 경강, 지금의 한강의 포구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경강에서 활동하는 선상과 객주를 지칭하는 경강상인의 세력이 가장 컸다. 경강에는 19세기 초에 “각지에서 생선이나 미곡을 싣고 모여드는 상선이 해마다 1만 척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비변사등록』 순조 17년). 경강상인은 서울 주민들의 일상 소비에 필수적인 쌀, 생선, 소금, 땔나무 등을 취급하였는데, 쌀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취급하는 물량이 많아지자 서울의 쌀값을 좌우할 정도가 되었으며, 1833년에는 경강객주가 시전과 결탁하여 쌀을 매점매석하여 쌀값 폭등으로 주민들이 시전에 불을 지르는 ‘쌀폭동’까지 일어났다.

상설시장으로는 서울 시전이 대표적

상설시장은 대도시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시전이었다. 시전은 20만 서울 인구의 일상에 필요한 재화를 공급하였지만 다른 중요한 기능은 왕실과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궁궐 수리와 과거장 설치 등과 같은 각종 국역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 반대급부로 서울 도성에서 10리까지 시전이 취급하는 물건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권한인 ‘금난전권’(禁難廛權)이 부여되었다. 금난전권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는데, 시전이 아닌 상인들의 ‘난전’이 시전의 영업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는 장시도 증가하고 경강상인과 같은 포구상업이 발전하였으며, 서울의 시장구조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에 뚜렷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농촌 장시는 상설시가 아닌 정기시였으며 객주는 위탁판매에 머물러 도매업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창고업, 숙박업, 금융업이 분화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시장의 발달과 서비스의 전문화를 뒷받침할 만큼 거래량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상인의 정치 참여가 봉쇄되어 권력의 침해로부터 재산권을 지키기 어려웠다는 점 외에도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는 한계도 많아

첫째 도시화율이 매우 낮았고 도시화가 정체되었다. 도시에 비 농업인구가 많이 거주해야 이들의 수요(소비)에 기초하여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서울의 인구는 17세기 중반에 20만명 정도에 도달한 후에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개항(1876년) 직전에 1만명이 넘는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40만명 내외에 불과하여 총 인구의 2.5%에 불과하였다(5000명 이상 지역을 합쳐도 3.4%).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 영주의 성 아래 지역(城下町·죠카마치)에 상인을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함으로써 도시가 발달하였다. 17세기 중엽에 각지의 죠카마치와 에도(도쿄), 오사카, 교토를 합하면 250만명을 넘어 총인구의 15% 이상을 차지하였다.

둘째 국제무역의 규모가 작았다. 무역의존도(무역/국내총생산)가 매우 낮아 개항 직전에 1.5% 수준에 불과하였다. 16세기까지 일본에 면직물과 인삼을 수출하여 얻은 은으로 중국의 비단이나 명주실을 수입하는 무역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17세기부터 일본에서 면직물을 자체 생산하게 됨에 따라서 면직물 수출이 중단되고 중국산 비단과 명주실을 수입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1687년에 중국과 일본에 국교가 수립되어 18세기 초부터 중국 상인이 직접 나가사키에 가서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자 한반도를 경유하는 중계 무역이 급감하였다.

더욱이 은 유출을 우려한 도쿠가와 막부가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인삼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대일 수출의 두절로 은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18세기 말부터는 개성상인들이 홍삼을 제조하여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하였다. 19세기에 홍삼 수출이 증가하여 임상옥과 같은 거상이 출연하기도 하였지만 특수한 약제인 홍삼의 제조에 기초한 무역의 확대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산업적 파급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