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공정거래제도 정비안
33년간 달라진 시장 상황 반영
독과점업체 가격남용기준도 완화
유통업계 "제품가격 오를 것"
공정위 "소비자 이득때만 허용"
[ 김주완 기자 ]
앞으로 제조업체가 유통업체에 제품을 공급할 때 일정 가격 이하로는 팔지 못하도록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독과점 업체가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제품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없도록 한 판단 기준도 완화된다. 유통업계와 소비자들은 이 같은 규제 완화로 물건값이 오를 것으로 우려하고 있지만 서비스 개선 등 소비자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에만 적용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제조업체 가격 결정권 커져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정거래법이 도입·시행된지 33년이 지나 시장상황이 달라졌다며 이런 내용을 포함한 공정거래 제도 정비 방안을 19일 발표했다. 개선안에 따르면 지금까지 일률적으로 금지한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사안별로 허용하기로 했다.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는 상품 제조사가 정한 가격 이하로 유통업체가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현재는 스마트폰 제조업체가 이동통신사에 스마트폰을 공급하면서 ‘80만원 미만의 가격으로 팔지 말라’고 하면 위법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80만원을 최저 재판매 가격(하한선)으로 설정할 수 있다.
신영선 공정위 사무처장은 “가격 이외 서비스 경쟁 등 유익한 경쟁이 촉진되는지 종합적으로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치는 국내외 관련 소송 판결에 따른 것이다. 2007년 미국 연방대법원, 2011년 한국 대법원에서는 소비자 후생에 도움이 되는 경우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공정위는 또 시장지배적 사업자(독과점 업체)가 상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도 일부 완화하기로 했다. 독과점 업체의 가격 남용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 중 공급비용(제품원가) 요건을 삭제한 것. 제품원가가 실제 판매 가격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따지기 어렵고 기술 개발, 원가 혁신으로 제품 원가를 낮춘 경우는 보상(높은 가격)이 필요하다는 지적에서다.
○제품 가격 줄줄이 오르나
유통업계와 소비자들은 이번 규제 완화로 인해 제품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로 제조업체가 소매상의 할인 판매를 막고, 독과점 업체는 가격 남용행위 규정 완화로 마음대로 제품 가격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스마트폰, TV 등 우월적인 시장 지위를 가진 일부 제조업체들이 마음대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실제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경쟁제한 효과와 경쟁촉진 효과로 엄밀히 따져 경쟁촉진 효과가 더 큰 경우에만 허용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유통업체의 서비스 경쟁 등을 통해 소비자가 얻는 이익이 손실보다 클 때만 판매 가격 하한선 설정을 허용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는 구두 시장에서 최고급 구두 제조업체가 소매상에 수준 높은 판매 환경과 서비스 제공을 요구하고, 대신 고급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 할인 판매를 금지하는 경우 허용된다. 또 애프터서비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가격만 싸게 책정해 고객을 확보하려는 경우 제조업체가 소매상에 제품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두 경우 모두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한 내용이다.
최무진 공정위 시장감시총괄과장은 “제조업체가 제품 가격을 무작정 규제하면 경쟁제한 효과가 커져 위법이기 때문에 일부 우려처럼 제품값이 쉽게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과점 업체의 가격남용 우려에 대해서도 “앞으로 제품 가격이 현저히 오르면 제품 원가 대신 수요 상황을 따져 제재하기 때문에 부당한 가격 인상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이와 함께 자산총액 또는 연매출 규모가 2조원 미만인 중소·중견기업집단에 대해서는 계열사 간 인수합병(M&A) 신고 의무를 면제하기로 했다.
■ 최저 재판매가격 유지 행위
상품 제조업체가 정한 가격 이하로 유통업체가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TV 제조업체가 대형마트에 TV를 공급하면서 ‘대당 100만원 미만 가격으로는 팔지 말라’고 할 때 100만원이 최저 재판매 가격이다.
세종=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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