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라 기자 ]
“축구공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다.”
세계인의 축제라 불리는 월드컵이 개막했지만 개최국인 브라질 민심은 흉흉하다. 거리로 뛰쳐나온 시위대는 “네이마르(브라질 축구선수)보다 선생님이 더 중요하다”며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월드컵 열기로 가득해야 할 상파울루 시내는 몇 달째 시커먼 연기로 가득하다. 지하철은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멈춰 설 위기다. 경기장 주변에는 불법 텐트촌이 늘어나 현재 4000가구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마존강 유역 원주민도 시위에 가세해 창과 활을 든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축구 종주국 브라질이 왜 축구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걸까.
살인물가·경기 침체가 문제
브라질은 월드컵 개최를 위해 경기장 건설 등에 330억헤알(약 14조원)을 쏟아부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남아공 정부가 쓴 돈의 세 배에 달한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이번 월드컵이 브라질 국내총생산(GDP)에 고작 0.2%가량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브라질 성장률을 1.8%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2010년 7.5%였던 브라질의 성장률은 지난해 2.3%로 떨어졌다. 통상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개최국의 경제 성장판으로 여겨졌지만 브라질이 올해 월드컵을 개최하더라도 성장률은 하락할 것이라는 이례적 전망이다.
브라질 정부가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흥청망청 예산을 낭비한 탓에 브라질 국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월드컵 인플레이션’ 탓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브라질 물가상승률은 지난 4월에도 6.28%를 기록해 5년 연속 물가상승률 억제 기준치(4.5%)를 넘고 있다. 현재 브라질에서 맥도날드 빅맥 햄버거는 6.7달러(6800원)로 미국(4.62달러)보다 2달러 이상 비싸다. 면도크림(12달러), 350mL 캔콜라(1.6달러), 20㎞가량 달리는 경기장행 버스 티켓(450달러·약 46만원)까지 치솟았다. 누적된 경기 침체와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려온 시민들은 “경기장 하나 지을 돈으로 학교 200개를 지었겠다”며 분노하고 있다. 아마존강 유역 주민들도 “하수 처리도 제대로 안 된 나라에서 호화로운 경기장이 무슨 소용이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브라질 경제에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는 위축됐다. 브라질 최대 경제단체 상파울루산업연맹(FIESP) 조사에 따르면 올해 GDP 대비 투자 비율은 18%를 밑돌 것으로 전망됐다. 브라질 정부는 2011년 ‘브라질 마요르(더 큰 브라질)’ 정책을 발표하면서 올해 GDP 대비 투자 비율을 22.4%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브라질의 GDP 대비 투자 비율은 주요 신흥국 중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성장 둔화, 정부 부채 증가 및 대외지표 악화 등을 이유로 지난 3월 브라질의 국가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한 단계 강등했다.
마약·범죄와의 전쟁이 시급
많은 경제학자는 브라질 경제가 2012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비전통적 방법을 동원했다. 국영 석유기업을 압박해 국제가격으로 수입한 석유를 보조금을 받고 싼 값에 팔라고 했다. 전력 관세 인하에도 개입했고, 시 정부와 주 정부는 대중교통 요금에도 개입했다. 브라질 정부는 이와 동시에 자국 통화 약세, 산업을 부흥하기 위한 일시적 세금우대 조치 등 한편에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모순된 정책을 썼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해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자국 통화가치가 급락하자 기준금리를 지난해 4월 이후 9차례 연속 올렸다. 현재 기준금리는 연 11%. 물가상승률이 계속 높아져 추가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예상이 나온다.
금융시장은 선전
암울한 경제지표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은 약진하고 있다. 브라질 증시의 보베스파지수는 올해 최저점이던 지난 3월 대비 10% 이상 올랐다. 헤알화 가치도 안정세다. FT는 “경제 체질 개선으로 나타나는 상승장이 아니라 월드컵과 10월 대선 기대감에 의한 ‘역설적 랠리’”라고 분석했다.
브라질이 월드컵을 통해 경제 성장의 모멘텀을 찾는 것보다 높은 범죄율과 열악한 교육 환경 등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브라질 싱크탱크인 게투리오바르가스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브라질에서 하루 평균(2010년 기준) 24명의 미성년자가 살해당하고 있다. 코카인 등 마약에 중독된 성인과 청소년은 각각 120만명, 5만명에 달한다. 불법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는 5~9세 어린이는 8만명 이상, 길에서 노숙하는 15세 이하 어린이도 약 2만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브라질 월드컵 때문에 웬 아르헨티나 외환위기설?
아르헨티나 경제가 브라질 월드컵 여파로 다시 출렁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10만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이 이웃 나라 브라질로 응원 원정을 가면서 약 2억달러의 페소화가 급격히 빠져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1월에도 외환정책에 실패하면서 하루 만에 페소화 가치가 14% 폭락, 신흥국 금융위기의 진원지로 꼽혔다. 페소화 가치는 2월 중순 이후 현재까지 5% 이상 추가 하락하며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못지 않은 축구 강국이다. 월드컵 출전 횟수는 11회, 통산 두 차례 우승했다. 컨설팅회사 퍼스펙티바스이코노미카스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의 세 경기에만 10만여명의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이 브라질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신용카드나 외화 환전 등 1인당 평균 2000달러(약 203만원)를 쓸 경우 월드컵 기간 중 총 2억달러가 유출될 전망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반토막난 외환보유액을 우려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외환보유액은 최고치였던 2011년 526억달러에서 최근 285억달러로 줄었다. 정부는 최근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 신용카드 사용에 세금을 35%로 올리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지만 지난 1분기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해외 사용액은 9억16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했다. 블룸버그통신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나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멀어서 응원을 못간 축구 팬들이 정부가 뭐라고 하든 이웃 나라로 원정을 떠나고 있다”고 전했다.
김보라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