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톈안먼 25주년

입력 2014-06-03 20:32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989년 6월4일이었으니, 딱 25년 전 오늘 새벽이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피의 강이 흘렀다. 시위대 875명이 목숨을 잃고 1만4550명이 부상당했다. 군경도 56명이 죽고 7525명이 다쳤다. 국제 구호단체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다음날 진압군의 탱크를 막아선 한 청년의 사진이 전해지면서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작 이 ‘탱크 맨’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든 보도가 막혔기 때문이다. 지금도 해외 인터넷 서버까지 막으려 혈안이 돼 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인 모순과 현실적 한계가 그대로 투영돼 있다. 당시 시위 배경부터 보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40주년과 5·4운동 70주년,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후야오방 전 총서기 사망, 통화 팽창, 관리들의 부정부패, 대량 실업 등이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개혁개방의 상징 인물인 후야오방의 갑작스런 사망이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는 마오쩌둥 사망 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도왔고 문화대혁명 피해자들을 복권시켰다. 그러나 당간부 가족들의 부패를 비판하다 보수파의 반발을 샀고 끝내 실각했다. ‘공산당의 양심’으로 불리던 그의 급사를 계기로 억눌린 민의가 폭발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요인도 있었다. 실용주의파가 시장가격제를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복지를 줄이는 쌍궤제(雙軌制) 정책을 펴면서 개혁에 나섰지만 하위 간부들의 부패와 범죄는 되레 늘었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곪을 대로 곪은 부패사회의 응어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25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정치·사회 개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올해도 공안 당국은 톈안먼 사태 25주기를 맞아 계엄을 방불케 하는 경계태세를 보이고 있다. 베이징에만 보안요원 10만여명을 투입했고 순찰인원도 85만여명으로 늘렸다. 시진핑의 톈안먼 사태 재평가 또한 이뤄지기 어려울 듯하다.

게다가 매년 10%를 넘나들던 중국 성장률은 시 주석 체제에서 3년째 7%대로 떨어졌다. 강력한 부패척결의 여파로 소비가 위축돼 성장률이 0.6%포인트 더 낮아질 것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그러니 톈안먼에 민감할 만도 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더 문제다. 수출 물량의 26%를 중국으로 보내는 마당에 정치적인 변수까지 겹친다면 고민이 커진다. 이제 중국의 민주화도 역사의 대세이지 싶은데 … .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