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4) 조선 전기의 국가재정…전세, 공물, 군역, 상납의 네트워크

입력 2014-05-23 19:26
수정 2014-05-29 13:42

국가재정이 튼튼한 나라가 망하기는 어렵다. 특히 고려왕조는 재정이 피폐해져서 멸망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멸망 직전에 과전법(1391)에 의해 재정의 근본이 되는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과전법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재정제도는 고려왕조의 재정제도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9회 참조). 국가가 필요로 하는 다종다양한 재화와 노동력을 수취하여 사용하는 현물재정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인 토지와 노동력을 조사하여 양안과 호적을 작성하여 조세수취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정도전(1342~1398)은 『조선경국전』(1394)에서 국가의 지출 항목을 상공, 국용, 군자, 의창,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구분하였는데, 왕실 경비인 상공, 관리에 대한 녹봉, 기타 관청의 경비인 국용, 국방을 위한 군자, 기근에 대한 진휼(구호)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외교가 주요한 용도였다.

고려 말기에는 관료들에게 수조권(조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이 부여된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고 자손에게 세습되어 ‘문벌귀족’의 사유지로 변모하였으며, 국가의 공민인 양인이 권력자의 사민으로 전락함으로써 국가의 재정 기반이 매우 협소해졌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는 이러한 추세가 반전하여 15세기에 호구가 증가하였으며(13회 참조), 경지면적도 국초의 80만결에서 세종대에 171만결로 증가하였다(표 참고). 이러한 조선 전기에 국가가 파악한 경지면적의 규모는 조선 후기에도 넘어서지 못하였는데, 국가의 재정 기반이 크게 확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 초기 경지면적 크게 확대

토지(경지)에 부과하는 전세는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방비와 외교사절 비용을 위하여 현지에 남겨두고 그외 지방의 전세는 조운 제도를 통해서 서울로 수송되었다(그림). 과전법 단계에서는 생산량의 10분의 1을 기준으로 삼아 논 1결당 현미 30두, 밭 1결당 잡곡 30두를 부과하였다. 세종대에는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20분의 1로 전세의 과세 기준을 낮추었으며, 작황에 따라서 9등급으로 나누어 1결당 최하 4두에서 최고 20두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이후 전세는 1결당 4두에서 6두의 최하 등급에서 고정되었으며 이는 생산량의 1%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전세의 세율이 낮아진 것은 작황이 계속 나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양반관리인 대토지소유자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재정수입에서 공물 비중 높아

반면에 재정수입에서 차지하는 공물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공물은 토지를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부과된 전세와는 달리 지방관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토지소유나 경제력에 비례하여 민간에 배분되기 어려웠다. 정확히 공물의 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측정할 길이 없지만, 1608년에 시작된 ‘대동법’에 의해 공물 대신에 토지 1결에 쌀 12두를 납부하였던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전세가 1결에 4두였으니 공물은 전세의 3배였던 셈이다. 대동법으로 공물 부담이 줄었다고 하였으므로 실제로는 3배가 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소(所)’와 같이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특수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부곡제’ 영역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반 군현에 공물을 배정하였다. 본래는 지방관의 책임 하에 현물로 직접 상납해야 하지만, 쌀이나 포목으로 공물값을 받고 대신 납부해주는 ‘방납(防納)’이 성행하였다.

공물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전세와 달리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상납을 해야 했으며 먼 거리를 운반하는 도중에 변질되어 퇴짜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방납은 지방민의 입장에서도 편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중앙의 권력자와 지방관 그리고 방납인이 결탁하여 높은 공물 가격을 강요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이 문제였다. “백성이 공물의 대가로 지불한 쌀과 포목의 10분의 5, 6은 방납인의 손에 들어가고, 3, 4는 [공물을 상납하는 자를 영접하는] 사주인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1, 2가 국가재정(국용)에 충당된다”고 할 정도였다(『광해군일기』 2년).

군역 부담 어려운 양인들 몰락

이 밖에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부역(요역)으로서 궁궐이나 성곽의 건축이나 도로 건설, 공물의 제조와 운반, 조세 상납 등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으며, 신역(국역)으로서 16세에서 59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상시적으로 노동력을 수취하였다. 신역은 다시 군역과 직역으로 나뉜다. 군역은 군인으로 직접 복무하는 ‘정군’과 이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족’(또는 보인)으로 나누어 부담하였다. 직역은 중앙과 지방의 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업무에 배정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군인을 군역제도에 의해 동원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체 군역의무자는 1393년 20만8000명에서 증가하여, 1477년에는 정군 14만6000여 명과 봉족(보인) 36만여 명을 합하여 5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군인들은 평소 농업에 종사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군부대에 입영하여 복무하는 병농일치의 군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군인에게 군인전이 지급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으며 대신 봉족이라는 노동력이 배정되었다. 이로 인해 재정 부담은 크게 줄일 수 있었지만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역을 부담하기 어려운 양인이 몰락하고, 일찍부터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군역을 대신하거나 군포를 상납하고 면제를 받는 것이 관행이 됨으로써 군사력 약화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국가 재정범위 좁아 상납 네트워크 형성

이러한 조선 전기의 재정제도는 현재의 재정제도와 비교할 때 지폐나 동전 유통 시도가 실패하여 쌀이나 포목과 같은 상품화폐 외에는 화폐가 사용되지 않는 현물재정이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국가재정의 범위가 매우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에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정운영은 중앙의 왕실과 관청에 대한 상납에만 관심이 있었고 지방재정의 운영은 거의 모두 지방의 관행에 맡겨져 있었다. 단적인 예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에게 지급되는 토지나 녹봉이 없었다.

중앙 관청의 경비나 관원과 하인들에 대한 인건비도 최소한으로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공물보다 더 많이 수취하여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청과 직책은 비공식적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어 거대한 상납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부패행위이지만, 당시의 관행으로는 정당한 수입이었다.『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형원(1622~1673)이 영의정 황희(1363~1452)가 대신들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은 지방 관원을 처벌하도록 임금에게 청하였다고 비판하였을 정도였다. 국가재정의 범위 안에 모든 중앙과 지방의 수입과 지출을 통합시키는 한편 이를 수량적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