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박제가 시 한 수 받지 못하면 청나라 지식인 축에도 못 꼈다는데…18세기 중국에서 박제가는 '한류스타'였다

입력 2014-05-22 21:38
수정 2014-05-23 05:08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720쪽 / 3만8000원


[ 서화동 기자 ]
‘삼천리 밖의 사람 서로 마주하여서/ 좋은 선비 만남 기뻐 그 모습을 그려보네/그대의 미쁜 운치 무엇에다 비할거나/ 매화 변해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1790년 8월 청나라로 두 번째 연행(燕行)을 갔던 박제가에게 당대의 유명 화가인 나빙이 직접 그려 준 초상화에 쓴 칠언절구 두 수 중 첫 수다. 박제가의 맑고 서늘한 운치를 매화의 환생에 비유한 것. 둘째 수에서는 “날 떠난단 말을 들으니 마음이 시고 매워 앞으로는 멋진 선비를 만나도 정을 주지 않고 담담하게 대하겠다”고 했다. 이별의 정이 마음을 슬프게 해서다.

1778년 3월 첫 연행을 시작으로 네 차례 연경에 사신으로 간 박제가는 그야말로 ‘한류스타’였다. 당대 연경 사림의 종장이자 예부상서였던 기윤, 옹방강, 완원 등 연경 문단의 명사와 지식인, 예술가들이 박제가의 뛰어난 시와 글씨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시 한 수쯤 받지 못하고선 문단과 지성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박제가의 셋째 아들 박장엄이 아버지가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시와 편지 등을 엮은 ‘호저집’에는 청조 문인들이 172명이나 등장한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정민 한양대 교수가 이런 한·중 지식인들의 지적 네트워크와 교유의 역사를 복원한 책이다. 두 세기 전의 교류사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하버드대 옌징도서관이 소장한 ‘후지쓰카 컬렉션’이다.

이 컬렉션은 청대의 학술과 문예가 조선에 전해진 과정을 평생 연구한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가 중국과 조선에서 수집한 것. 후지쓰카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 교수를 지낸 추사 김정희 전문가였다. 국보 제180호인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도 그가 소장하다 태평양전쟁 끝 무렵 서예가 손재형에게 넘겨준 것이다.

60여년간 서가에 잠들어 있던 후지쓰카 컬렉션은 2012년 방문학자로 옌징연구소를 찾은 정 교수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정 교수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간 생생한 교류를 담은 ‘후지쓰카 컬렉션’에 파묻혀 살았고, 당시 양국 지식인들의 우정과 소통을 복원해낸 것이 이 책이다. ‘문예공화국’이란 17~18세기 유럽 각국 인문학자들이 라틴어를 매개로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서로 소통하던 지적 공동체다.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한문을 매개로 소통하면서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형성했다는 의미다.

책에는 홍대용이 막을 열고 박제가가 발전시킨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발달사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돼 있다. 당시의 활발했던 지적 소통을 정 교수는 “서로의 지적 역량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만남이 만남을, 우정이 우정을 낳으면서 양국 지식인들의 소통은 지속적으로 확장했다”고 설명한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 어떻게 청나라 지식인들과 만남의 물꼬를 텄고 확장했는지, 조선 지성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과 독서를 사랑한 후지쓰카가 옛 전적을 사거나 필사해 모은 과정과 책을 읽으며 남긴 교정 및 메모들, 후지쓰카 컬렉션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정 교수가 느낀 학문적 희열과 감동도 생생하다. 18세기 조선과 중국, 20~21세기 한·중·미·일을 오가며 두 세기 전의 지적 교류사를 복원해낸 저자의 열정도 놀랍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