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디자인 올인…'명품 블록' 개발에 지구 25바퀴 투자했죠"

입력 2014-05-16 07:00
기업인 탐구 - 이노블록

1년에 10여차례 해외 시장조사
누적 출장거리만 100만㎞ 달해

美·日·獨 등 선진업체와 기술 제휴
과감한 설비투자로 자동화공정 구축

2000여종 생산, 국내 업계 1위로
中·日 겨냥…글로벌 강소기업 발돋움


[ 김낙훈 기자 ]
이노블록

경기도 화성에 있는 이노블록(사장 한용택65)은 ‘블록업계의 벤츠’로 불린다. 고품격 디자인 제품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어서다. 종업원 75명의 중소기업이 이 분야에서 질주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쫄깃한 면발과 담백한 국물맛이 일품인 사누키우동. 이 우동의 본고장인 일본 시고쿠섬 가가와현에 10여년 전 한용택 이노블록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한 사장은 맛과 멋을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날 가가와현을 찾은 것은 우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블록업체 니코에 들어섰다. ‘기술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니코의 제품은 일반 블록과는 달랐다. 미적인 감각과 품질이 뛰어났다. 그는 이곳을 찾기 위해 무려 1만㎞가 넘는 길을 돌아왔다. ‘산삼’을 찾아 수많은 산을 헤매는 심마니처럼 세계 각지를 다니다 마침내 이 회사를 찾아낸 것이다.

그는 이에 앞서 2003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콘크리트 관련 제품 및 설비전시회’에서 굴지의 설비업체인 일본 타이거기계 관계자를 알게 됐고 나중에 오카야마에 있는 타이거기계를 찾아 기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설비는 길이가 100~200m에 이르고 가격도 수십억원에서 100억원대에 이를 정도로 고가의 자동화 설비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당신네 기계를 도입할테니 니코와 기술제휴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타이거기계 관계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년 회사 역사에서 이런 당돌한 요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기계를 사면 샀지 우리 회사도 아닌, 우리 고객사와 기술제휴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는 또 뭔가.’

끈질긴 요구에 타이거기계는 결국 니코를 연결해줬다. 기술 도입료 없이 기술을 달라는 이 기업인의 요구는 니코 입장에서는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네 번의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다섯 번째 방문에서 ‘오케이’를 받아냈다. 잘 팔리면 약간의 로열티를 주는 조건이었다.

니코 경영진은 한 사장의 실력과 열정 그리고 성실성에 마음을 연 것이다. 한 사장은 독일을 10여 차례 찾아 마침내 유럽 블록업계의 맹주 고델만과 기술제휴를 맺었고 미국시장의 강자인 앵커 및 로제타와도 기술협력을 맺었다. 대부분 초기 기술 도입료 없이 약간의 러닝로열티만 주는 조건이었다.

마침내 블록 분야의 간판 기업인 미국·독일·일본의 4개사와 제휴를 맺는데 성공했다. 그가 다닌 거리는 약 100만㎞, 지구 25바퀴에 이른다. 최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각지의 ‘고수’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그들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한 사장은 “부담이 되는 계약을 원하지 않았고 우리가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며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해박한 블록 지식과 시장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상대방에게서 신뢰를 얻은 결과였다. 독일의 가족기업 고델만의 경영진은 한 사장을 이제 ‘패밀리’로 대우할 정도다.

그가 이런 행보를 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는 부친이 1971년 안양에서 세운 블록업체를 맡아 1985년에 경영에 참여했다. 성균관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포스코에서 10년간 고로 설비를 담당했던 한 사장이 부친의 부름을 받고 경영에 동참한 것이다. 당시 이노블록은 국내 200여개에 이르는 블록업체 중 평범한 한개의 벽돌업체에 불과했다. 그 뒤 1988년 대표를 맡았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벽돌공장에서 그의 작업복은 늘 시멘트가루로 덮혀 있었다. 외환위기를 거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장은 급속도로 레드오션으로 변해갔다. 치열한 가격 전쟁이 벌어지고 이전투구가 성행했다.

그는 중대한 결심을 내려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대대적인 혁신에 나서거나 사업을 포기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불면의 밤이 지속됐다. 침대에 누우면 해외에서 본 아름다운 조경블록과 보도블록이 떠올랐다. ‘그렇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친환경 블록을 만들어 제값 받고 팔자.’ 블록 분야의 ‘벤츠’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주위에선 한 사장을 비웃었다. 심지어 ‘미쳤다’는 얘기도 들었다. 수백억원의 투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기술을 이전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몸으로 부닥쳐보기로 했다. 1년에 10여 차례씩 해외출장을 다녔다. 선진국의 블록시장, 보도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블록 형태, 디자인, 색상 등을 조사했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와 예술의 도시 빈, 물의 도시 프랑스 안시와 벨기에 브뤼헤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메모했다.

한 사장은 “블록업계에서 차별화하고 1등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시장을 조사하고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고 밝혔다. 사명을 ‘블록을 혁신한다’는 의미에서 2005년 이노블록으로 바꿨다. 회사의 구호도 ‘Only one, Best one’으로 정했다.

하지만 외국 기술을 그대로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체 연구소에서 국내 원자재 시장과 디자인 트렌드, 고객 수요에 맞춰 새로운 디자인 감각을 지닌 블록을 속속 개발했다.

여기에는 천연색을 갖는 블록을 비롯해 투수성 콘크리크블록 등이 들어있다. 중세 유럽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캐슬스톤, 독일 바이엘의 안료를 사용해 자연석 느낌이 나는 경관옹벽 블록, 여름철 도심의 열섬효과를 완화하는 축열경감 기능성 블록, 차별화된 디자인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삼각형 보도블록 등 매년 수십종의 신제품을 개발했다.

현재 이 회사는 2000여종의 블록 제품을 생산해 국내 최대 업체로 등극했다. 한 사장은 “연매출은 약 250억원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의 본사이자 제1공장이 있는 화성 공장은 약 200m에 이르는 자동화공정을 갖추고 있다. 설비투자 100억원을 포함해 약 200억원이 투자돼 2009년 완공된 이 공장은 이노블록의 주력 생산라인이다. 약 3만3000㎡에 이르는, 블록업계에선 제법 큰 공장이다. 인근의 2공장(약 1만3000㎡)을 포함해 모두 자동화설비를 구축했다.

화성 본사 앞마당에는 자사 블록을 사용해 작은 폭포와 연못, 잔디와 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멋진 조경에 ‘브라보’를 연발할 정도다. 블록이 거리와 환경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노블록은 다양한 제품개발 노력을 인정받아 ‘우수 환경 조경제품 인증’을 얻었고 환경부장관상, 지경부장관상, 국토교통부장관 표창 등 수많은 상과 표창을 받았다.국내 시장은 입주자들의 입소문에 의해 개척됐다. 2군 건설업체들이 차별화된 조경을 위해 이노블록 제품을 사다쓰자 유명 건설업체의 아파트 입주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도 이노블록 제품으로 조경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유명 건설사들이 속속 채택하는 계기가 됐다.

한 사장은 이제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일본 중국 시장을 겨낭하고 있다. 그는 “신뢰의 바탕 위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면 국내든 해외든 인정을 받게 마련”이라며 “우직하게 좋은 재료를 쓰고 철저하게 품질을 검사하며 아름답고 친환경적인 제품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