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경제적 선택을 제약하는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며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제도’(institution)란 사회구성원이 지켜야 할 ‘경기규칙’(rule of the game)으로서 공식적 제도와 비공식적 제도가 있다. 공식적 제도는 헌법을 비롯한 법률과 같이 명시적으로 제정된 규칙이며, 비공식적 제도는 도덕이나 관습과 같은 불문의 자생적 규칙을 말한다.
어느 사회든지 구성원들은 자기 마음대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기술적 제약은 물론, 제도적 제약 아래에서 경제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모든 제도를 국가가 만들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국가는 제도를 제정하고 처벌과 보상을 할 수 있는 물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선택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문벌귀족에서 신흥사대부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경제적 선택을 제약하는 제도적 환경을 바꿈으로써 경제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과연 조선왕조(1392~1910)의 건국은 고려시대의 제도적 환경을 변화시켰는가? 단절과 연속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조선왕조가 고려왕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주체인 ‘신흥사대부’가 고려왕조의 지배층인 ‘문벌귀족’과 경제적 기반이나 정치적·사상적 지향에서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고려의 ‘문벌귀족’은 과거제를 통해 관리가 되어 수도(개경)에 거주하였지만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제에 의해 신분을 자식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고려 후반부터는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부여받은 토지(사전)를 권력을 이용하여 소유지로 만드는 한편, 국가의 공민인 농민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사민(私民)으로 만들어 농장을 경영하는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사상적으로도 유학보다는 문장에 관심이 많았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친화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왕조의 개창을 주도한 ‘신흥사대부’는 지방 향촌에 근거를 두고 유학 특히 남송(南宋)의 주자(朱子, 1130~1200)에서 비롯된 주자학에 심취하였으며 정도전(1342~1398)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보듯이 불교에 적대적이었다. 중앙의 ‘문벌귀족’의 관직 독점과 대토지소유로 인하여 관직에 입신하는 길이 막혔고 어렵게 관리가 되어도 전시과제도에서 지급하도록 규정된 사전을 지급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신흥사대부’의 현실적 불만과 새로운 사상적 지향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과전법(1391년)에 의해 ‘문벌귀족’의 대토지소유 확대에 의해서 유명무실해진 전시과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양반 관리에게 사전을 지급하는 제도를 재건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문벌귀족’을 타파하고 양천제(良賤制)로 신분제도를 단순하고 명확하게 만듦으로써 천인이 아닌 16~60세의 남자는 누구든지 국역(國役)을 부담하도록 하는 한편,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단절이 맞다면 조선은 근대의 시작
이상의 주장이 모두 맞다면 조선왕조 건국은 중세의 연속이 아니라 ‘근세’ 나아가 ‘근대’의 시작으로까지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조선왕조는 근대국가라고까지 평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가 없지는 않다. 고려에 비하여 과거제도도 정비되어 음서제가 대폭 축소되어 능력본위의 관리 선발제도가 갖추어졌으며, 국왕 중심의 보다 체계적인 관료제도가 수립되었다. 지방통치에 있어서도 중앙집권의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고려시대에는 군현제라고 하여도 520여개의 군현 중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은 130여곳뿐이어서 나머지 군현은 향리가 관장하고 지방관이 파견된 근처 군현(주현)의 관할을 받는 속현이었다. 더욱이 군현제 영역과는 별도로 모두 920여개에 달하는 향, 소, 부곡, 장, 처와 같은 부곡제 영역이 광범히 산재하였는데 속현과 같이 향리가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전국 330여개의 군현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을 뿐 아니라 부곡제 영역을 폐지함으로써 전일적인 군현제로 지방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건국세력 기존 지배층과 비슷한 측면도
한편 조선시대를 고려시대와 함께 ‘중세’로 시대구분을 한 것은 연속성이 단절성보다 강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농민반란이나 이민족의 정복에 의하여 왕조가 교체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가 왕조를 개창하였다. 고려왕조가 40년 가까이 되는 후삼국 시대의 전란을 통해서 성립하여 골품제에 근거한 경주 진골귀족을 지방 호족이 대체한 것과 비교해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평화로운’ 왕조교체가 대규모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과연 기존의 ‘문벌귀족’이 타파되고 양천제가 수립되는 것과 같은 신분제도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을까 의심되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문벌귀족’ 자체가 지방의 호족과 향리 가문으로부터 기원하여 중앙의 관료로 성장한 계층이라는 점에서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와 신분이나 출신배경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욱이 ‘신흥사대부’의 실체 자체가 의심되고 있다. 왕조교체기의 중앙관리의 가문을 조사한 존 던컨(John B Duncan)의 연구에 따르면(『조선왕조의 기원』) 조선왕조 건국 후 태조대에 책봉된 1등 공신 18명 중에 겨우 3명만이 신흥사대부 가문 출신이라고 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조선 전기의 가장 주요한 가문은 대부분 고려의 양반 가문에서 기원하였으며, 안동(安東)권(權)씨, 황려(黃驪) 민(閔)씨, 파평(坡平) 윤(尹)씨, 문화(文化) 유(柳)씨와 같은 고려왕조의 주요한 가문은 조선왕조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문으로 건재하였다. 반면에 14세기 중반 이후에 중앙 관리를 처음으로 배출한 신흥 가문은 1392~1405년 동안에 확인된 모든 관원 및 재추(宰樞, 2품 이상의 고위 관원) 중에서 각기 10% 이하를 차지하는 데 불과하였다. 또한 고려 후기의 주요 가문 중 소수 가문만 조선왕조 건국 후 중앙 권력으로부터 축출되었다.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토지제도와 관련해서도 조준(趙浚, 1346~1405)이 주도한 과전법 개혁은 과전(사전)을 고려시대와 달리 수도 주변인 경기 지역에 한정함으로써 사유지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고려후기 이래로 확장된 대토지소유의 소유권 자체를 문제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말기에 거의 마비상태에 빠져들었던 국가의 수조권은 다시 강화하였지만 농민에 대한 토지 재분배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호적제도와 호패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인적 자원에 대한 파악 능력을 제고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 향리는 지방에 묶어두고 그 지위를 약화시켜 중앙의 관직을 둘러싼 경쟁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다.
양반관료제 국가 재건에 의의
조선왕조의 건국은 중앙의 귀족화된 관료의 대토지소유로 인하여 재정기반이 크게 잠식되었던 국가의 재정기반을 확충하고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를 강화함으로써 양반 관료제 국가를 재건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양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대토지소유와 노비제도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기반은 처음부터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농본주의에 입각하여 재정의 기초를 철저히 농업과 농민에 두었으며 상공업은 국역제도와 시전(市廛)체제에 의하여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조선왕조초기에는 지방의 장시(場市)마저 소멸되었다. 주자학적 세계관에 딱 들어맞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 잘 어울리는 체제가 성립한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