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졸업 학점을 채운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장모 씨(28)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졸업앨범을 찍지 않기로 했다. 이름도 모르는 후배들과 찍는 졸업앨범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동기들 취업 시기가 전부 다르니까 졸업도 따로 해요. 언제 졸업할지 몰라 앨범 촬영을 미뤘는데 이젠 모르는 사람들과 찍어야 할 상황이라 그냥 안 찍으려구요.” 장씨는 취업난으로 졸업을 연기하고 있는 ‘졸업 유예생’이다.
예년 이 맘 때면 졸업앨범 촬영으로 시끌벅적했던 캠퍼스가 비교적 한산하다. 졸업을 미루는 대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졸업앨범 수요도 급감했기 때문이다.
9일 대학가에 따르면 최근 2~3년 동안 대학별 졸업앨범 신청부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국외대의 졸업앨범 신청부수는 2012년 1000부에서 지난해 780부, 올해 524부로 크게 줄었다. 서울시립대도 2012년 420부에서 지난해 230부, 올해는 200부까지 감소했다. 두 곳 모두 2년 새 반토막 났다. 광운대의 경우 지난해 약 1000부에서 올해 800부로 줄었다.
대학가는 이런 감소 추세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달 1학기 졸업앨범 촬영을 마친 광운대는 촬영자 수가 전년 동기보다 100명 넘게 줄었다.
졸업앨범의 수요 감소엔 늘어난 졸업유예생의 영향이 크다. 예전엔 동기끼리 비슷한 시기에 졸업하고 함께 앨범을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엔 취업난 탓에 졸업을 미루는 ‘졸업 유예생’들이 늘어나면서 졸업, 앨범 촬영 시기도 제각기 달라졌다. ‘추억’이란 졸업앨범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됐다.
광운대 졸업준비위원장 홍성균 씨(25)는 “취업이 힘들다보니 졸업유예생이 많아졌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당장 졸업을 하지 않는 친구들은 졸업 앨범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는 작년보다 졸업앨범 신청자수가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비싼 가격도 졸업앨범이 외면받는 요인이다. 앨범 가격만 5만 원~10만 원에 이르고 전문 메이크업이나 헤어 관리엔 추가 비용이 든다.
IT업체에서 일하는 최모 씨(29)도 대학교, 대학원 모두 졸업앨범을 찍지 않았다. 비용 대비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졸업을 미뤄 등록금, 생활비가 많이 들었는데 졸업앨범 비용은 큰 부담이었다” 며 “여학생들은 헤어와 메이크업, 정장까지 추가로 수십 만 원이 들어 허리가 휜다”고 말했다.
비싼 돈을 주고 찍은 앨범이 값어치가 없다는 지적도 많다. 앨범 제작업체의 실수나 성의 없는 수정 서비스는 학생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지난해 졸업앨범을 찍은 K대 박모 씨(27)는 앨범 속 자신의 이름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올라온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는 “동기들과의 추억을 위해 찍었는데 내 이름에 타과 동명이인의 얼굴이 있었다. 앨범 제작업체의 어이없는 실수에 웃음밖에 안 나왔다”며 앨범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했다.
대학측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학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다. 경희대와 이화여대는 지난달 '공개 평가'를 통해 졸업앨범 제작업체를 선정했다. 경희대는 졸업준비위원장과 단과대 대표들이 후보 업체들의 공개 프레젠테이션 평가에 참여했고,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대중 프레젠테이션과 품평회까지 도입했다.
경희대 학생지원과 관계자는 “학생들이 선택권을 갖고 직접 평가하는 만큼 만족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한다” 며 “업체들이 공개 평가를 염두해 서비스에 더 많이 신경 쓴 덕에 학생들이 졸업앨범 촬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박희진 기자 hotimp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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