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악몽…분노…절규…대한민국의 4월은 잔인했다

입력 2014-04-26 09:00
세월호 침몰 10일간의 기록


[ 김태호 / 윤희은 / 오형주 / 박재민 기자 ] 따듯한 봄기운이 완연했다. 사람들은 여느때처럼 분주하게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4월16일 오전. 평범했어야 할 그때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있었다.

꽃다운 생명들이 스러져갔다. 저마다 가족과 한 약속이, 훗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부의 미흡한 대처와 속속 드러나는 사고 원인은 사람들의 슬픔을 분노로 바꿔 놓았다. 동시에 자책감과 미안함이 번져갔다. 열흘이 흘렀다. 많은 사람이 이토록 함께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을까.

실종자 가족은 진도 팽목항과 체육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가늘어지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서다. 아직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가 110여명에 이른다. 이 기사는 팽목항과 진도 체육관, 목포와 안산의 병원, 안산 단원고 등에서 ‘눈물’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10일간의 ‘짧은’ 기록이다.


○체념과 원망…조금만 빨랐다면

“일어나야지 우리 딸. 엄마랑 영화보기로 했잖아.”

세월호 침몰 사고 7일째인 지난 22일 밤 10시. 팽목항에 시신 네 구가 들어왔다. 가족 20여명이 대기실에서 사망자 신원확인실로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절규하는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싸늘하게 식어 돌아온 자식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이름을 불렀다.

유속이 느려지는 소조기 첫날.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텨왔지만, 애타게 기다렸던 ‘생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신만 30여구가 돌아왔다. 확인된 사망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가족들의 기대는 조금씩 체념으로 변해갔다.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들렸다.

실종자 가족이 모여있는 체육관. 오열과 눈물뿐이던 이곳에선 이날 통곡도 고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뉴스에서 사망자 정보가 뜨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묻은 채 엎드리는 가족이 보였다. 들썩이는 등이 참았던 울음을 쏟아내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첫날만 해도 진도엔 ‘희망’이 있었다. 생존자들이 팽목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우리 애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족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정부에 대한 원망은 깊어졌다.

19일 수색작업이 지지부진하자 학부모 수십명이 해경을 찾아가 “배를 빌려주면 구조 현장을 보고 오겠다”고 했다. 또 “민간 잠수사들을 투입하라”고 요구했다. 공무원들의 부주의는 가족들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 안전행정부의 한 국장은 팽목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바로 직위해제됐다.

소조기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24일 밤 가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등 사고 책임자들을 앉혀 두고 대책을 요구했다.

○가족 두 번 울린 행정절차

사고 사흘째인 18일. 단원고의 한 교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안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전날 이뤄진 검안에서 김모양(17)으로 판정받고 안산으로 올라간 시신이 확인 결과, 다른 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시 목포로 내려온 교사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신이 자꾸만 먼길을 왔다 갔다 하니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붉혔다. 밤 11시가 돼서야 신원이 밝혀졌고, 다시 한번 안산으로 길을 떠났다.

검찰은 이후 시신 인도 절차를 강화했다. 그런데 가족들은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20일 오후 8시 목포 기독병원 앞. 열 명가량의 학부모와 경찰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한 실종자 어머니가 “내 새끼인 걸 확인했는데 대체 왜 못 데려간다는 거야”라며 병원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강화된 절차에 따라 모든 미성년자 시신에 대해 DNA 대조검사를 실시한 뒤 부모와 유전자가 일치하는지 확인돼야 인도가 이뤄졌다. 검사에 24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였다. 한 아버지는 “얼굴을 봐도 내 아이고, 소지품을 봐도 내 아이인데 육지에서까지 두 번 죽이는 것이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검찰은 결국 DNA 검사가 끝나기 전에라도 시신을 인도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목포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다만 DNA 검사가 끝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관계증명서’도 유족을 화나게 했다. 22일 새벽 목포 기독병원 앞에선 한 실종자 가족이 “이 시간에 어디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느냐”고 소리쳤다. 시신을 인도받으려면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새벽에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슬픔을 나누는 아이들

단원고는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단원고가 있는 안산 전체가 그렇다.

사고가 난 16일 낮 12시. 단원고엔 수백명의 학부모가 사고 소식을 듣고 와 있었다. 앞다퉈 진도행 버스를 타려고 했다. 3층 교무실에 차려진 대책본부로 몰려간 부모들이 자식의 생사를 물었지만, 교사들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상황판이 마련되고 구조된 학생들의 이름엔 형광펜으로 표시가 됐다. 표시가 되지 않은 학생이 훨씬 많았다.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은 사실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우리 애는 살아있느냐”며 교사들을 다그쳤다. 진도로 내려가는 버스가 매시간 출발했다. 이 길이 이토록 다시 돌아오기 힘겨운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첫날부터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촛불이 켜졌다. 무사귀환을 기도했다. 17일 저녁에는 비가 내렸지만 전날보다 더 많은 학생이 모였다. 인근 학교 학생들까지 동참해 운동장 벤치가 꽉 찼다. 비가 내리자 학생들은 촛불 대신 스마트폰을 들었다.

한 학생이 “지금 비가 내립니다. 춥지만, 바닷속에 있는 우리 친구들은 지금 더 추울 겁니다. 우리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외쳤다. 1시간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단원고 주변의 동네는 적막하기만 했다. 19일 오후 빌라들이 늘어선 고잔1동은 인구 70만명의 공업도시 안산에서 가장 조용한 주택가로 꼽힌다. 다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공원이 적지 않아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다.

사고 9일째인 24일 3학년 학생들이 등교했다. 교사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학생들은 오히려 교사를 걱정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단원고 학생들은 슬픔을 나누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김태호/윤희은/오형주/박재민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