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의 명암
삼성그룹이 1조원을 들여 계열사 간 지배구조를 단순화하는 마스터 플랜을 짜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의 약점으로 지적돼온 계열사 간 순환출자 구조와 금융·산업자본 간 혼합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경영 투명성과 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로 분석된다. - 4월 24일 OO신문
☞ 삼성그룹이 순환출자 해소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순환출자를 없애고 지배구조를 단순화해 경영의 투명성을 더 높이겠다는 뜻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과 이건희 현 회장에 이은 후계 체제 정립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삼성 측은 현재 50건이 넘는 계열사 간 순환출자 건수를 2016년까지 제로로 만들어 경영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순환출자란 무엇이고, 삼성은 왜 이를 해소하려 하는 걸까?
순환출자란?
순환출자(循環出資)란 말 그대로 같은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돌아가면서 서로 자본을 대는(출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그룹 안에서 A 기업이 B 기업에, B 기업은 C 기업에, C 기업은 또 A 기업에 다시 출자하는 식으로 그룹 계열사들끼리 돌려가며 자본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자본금으로 100억원을 가진 A사가 B사에 50억원을 출자하고, B사는 다시 C사에 30억원을 출자하며, C사는 다시 A사에 10억원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자본금과 계열사 수를 늘릴 수 있다. A사는 이런 순환출자를 통해 자본금 100억원으로 B사와 C사를 지배하는 동시에 자본금이 110억원(원래 자본금 100억원+C사가 출자한 10억원)으로 늘어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110억원 중 늘어난 10억원은 장부상에만 기록되는 돈일 뿐 실제로 입금된 돈은 아니다. 그래서 이를 가공자본(架空資本)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가짜로 만들어진 자본’이라는 뜻이다. 순환출자와 가공자본은 단순히 생각하면 나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순환출자의 두 얼굴
순환출자는 한 계열사의 경영이 악화되면 출자한 다른 계열사까지 부실해지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B사가 부도나면 멀쩡한 A사는 물론 C사도 영향을 받는다. 그룹 전체가 한꺼번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대기업이 계열사를 늘리는 수단으로 순환출자를 활용하기도 한다. 현행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과 상법은 두 계열사 간의 상호출자를 금지하고 있다. 반면 순환출자는 규모나 내용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아 그동안 규제하지 않아 왔으나 공정거래법이 개정돼 오는 7월부터는 신규 순환출자가 금지된다. 공정거래법 개정 논의 당시 기존 순환출자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기업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우려로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순환출자와 가공자본은 대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가령 자본금 2000억원인 A사가 새롭게 떠오른 전기자동차와 사물인터넷 사업에 뛰어들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전기차와 사물인터넷 사업을 새로 벌이려면 각각 최소 500억원과 300억원의 자본금을 가진 회사가 필요하다. 만약 순환출자가 금지될 경우 A사는 800억원이라는 새로운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순환출자가 허용됐다면 자본금 2000억원을 활용해 전기차와 인터넷 업체를 설립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새 기업을 설립하면 일자리는 늘어나고 전기차와 사물인터넷 관련 시장은 경쟁이 격화돼 소비자들은 보다 좋은 제품을 보다 싸게 살 수 있게 된다.
사회적 후생이 커지는 것이다. 특히 기업 신용도가 약해 새로운 사업 자본을 모으기 어려웠던 과거에 순환출자는 기업이 신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했다.
또 상호출자는 기업들의 구조조정 수단으로도 활용돼 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그룹들은 빚을 줄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미만으로 낮춰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대규모 유상증자(자본금을 늘림)를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그룹 내 자금력 있는 기업들의 계열사 출자(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순환출자가 본격 확산된 것은 바로 이 때다. 또 다른 부실 기업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계열사들이 분담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순환출자 구조를 형성하기도 했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은 어떻게?
순환출자를 끊으면 기업의 지배구조가 단순해진다. 개별 기업별로 가장 지분을 많이 가진 주주가 회사의 주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삼성은 삼성전기 삼성정밀화학 삼성SDS 제일기획 등 4개 계열사가 각각 보유 중이던 삼성생명 지분 1.63%를 지난 22일 3118억원에 처분했다. 삼성 비금융 계열사들이 이렇게 삼성생명 보유 지분을 처분함으로써 삼성그룹 내에서 삼성생명 지분을 가진 계열사는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 한 곳만 남게 됐다.
시장에서는 이번 주식 매각을 통해 삼성에버랜드를 제외한 비금융 계열사의 삼성생명 지분 보유 구조가 해소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비금융 계열사와 삼성생명 간 출자구조가 약화됐다는 의미다. 삼성이 장기적으로 계열사들을 금융과 비금융으로 양분해 금융 계열사는 삼성생명이, 제조 계열사는 삼성전자가 거느리는 체제로 재편할 것이란 얘기도 나돈다.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을 중간지주사로 한 ‘금융 계열’과, 삼성전자를 중간지주사로 내세우는 ‘제조 계열’로 그룹을 재편한다는 시나리오다. 일본 소니처럼 삼성에 금융지주회사가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은 이처럼 제조 계열사와 금융 계열사 간 출자구조를 해소하는 한편으로 삼성SDI와 제일모직 합병,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 합병 등 제조 부문 계열사의 재편도 추진 중이다.
기업 경영에 걸림돌 돼선 안돼
삼성이 순환출자를 모두 해소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삼성이 금융-제조 체제로 재편하려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21%(약 15조원 규모)를 삼성의 개인 대주주나 삼성에버랜드 등이 사줘야 한다. 또 이 과정에서 해당 기업들은 막대한 세금도 내야 한다.
순환출자 해소는 투명 경영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의 경쟁이 한층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이나 연구·개발(R&D)에 투입해 일자리를 늘리면 훨씬 더 좋을 돈을 회계 장부상의 독립에 한꺼번에 쓰게 만드는 건 좋지 않다는 견해도 상당수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복잡한 순환출자는 경영권 안정 문제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순환출자 해소도 기업들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단계적 순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기업 대주주나 경영진도 경영을 보다 투명하게 할 의무가 있다. 순환출자는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 유럽 기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선 기업 경영권을 보호해주기 위해 차등의결권 주식(dual vote share)까지 허용한다. 주식회사 제도에선 1주에 대해 1의결권(표결권)이 주어진다. 이른바 주주평등의 원칙이다. 하지만 복수의결권, 다중의결권 등으로도 불리는 차등의결권 주식은 1주에 대해 1:2, 1:10 등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다.
구글은 최근 주식 분할을 통해 주당 의결권이 1개인 클래스 A주와 의결권 10개를 가진 클래스 B주, 의결권이 없는 C주를 발행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저커버그, 포드자동차의 대주주인 포드 가문도 의결권이 10배인 클래스 B주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건 기업들이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업에 매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김현종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순환출자 해소에 활용될 수 있는 지주회사 제도도 현재 과도한 규제로 인해 기업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기업들이 원활히 순환출자를 해소할 수 있도록 정부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