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포장지에 얼굴이 나오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은 자메이카 청년들
19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 도전 실화
[ 김유미 기자 ]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쿨러닝’ 을 통해 본 GDP와 경제 성장
1987년 11월 카리브해의 섬나라 자메이카. 달리기 선수인 데리스(리온 분)가 레게머리 절친인 상카(더그 E 더그 분)를 설득 중이다. 3개월 뒤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봅슬레이 선수로 출전하자는 것. 상카는 얼음이란 단어만 듣고도 말문이 막힌다. 열대지방에서 얼음이란 아이스크림 상점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이 기막힌 도전에 슬슬 가속도가 붙는다. ‘유명해져서 과자 포장지에 얼굴이 나오고 싶다’는 이들의 꿈은 이뤄질까.
1993년 개봉한 코미디영화 ‘쿨러닝(Cool Runnings)’ 얘기다. 19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단의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 승률 ‘제로(0)’로 보이는 이들의 도전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자메이카와 동계올림픽의 ‘잘못된 만남’ 때문일 것이다. 봅슬레이라는 작은 썰매에 오를 수 있는 승차권은 부자나라들에나 허용됐으니 말이다.
국민소득이 중요한 이유
육상소년 데리스는 돌멩이와 휴지로 만든 간이코스에서 날마다 뜀박질을 한다. 하지만 올림픽 출전이라는 평생의 꿈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좌절되고 만다. 그가 이름도 생소한 봅슬레이에 눈을 돌린 계기는 ‘단거리 육상선수가 봅슬레이에 강하다’는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하루빨리 섬을 벗어나고 싶다는 욜(말릭 요바 분), 소심한 마마보이 주니어(롤 D 루이스 분), 푸시카트(자동차를 본뜬 손수레) 경주 챔피언인 상카가 오합지졸 선수단에 합류한다. 이들의 훈련은 웃음거리다. 빙상장도 없는 이곳에서 완공에만 1200억원(평창올림픽 기준)이 드는 봅슬레이장은 엄청난 사치다. 이 때문에 녹슨 고물 썰매로 언덕길을 미끄러져내리고, 추위 적응 훈련은 아이스크림 노점에서 해결한다. 이들의 고난은 자메이카가 사탕수수와 커피를 주산물로 하는 ‘저소득국가’라는 데서 온다.
여기서 국민소득이 중요하다. 비싼 인프라와 장비가 필요한 겨울스포츠는 국민소득과 특히 관계가 깊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 1~4위인 캐나다 독일 미국 노르웨이는 모두 1인당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이 3만달러 이상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 국가의 1인당 GDP가 1000달러 증가할 때마다 동계올림픽 참가 선수는 2명, 금메달은 0.5개씩 늘어난다.
GDP는 곧 국민의 생산능력
국민소득을 비교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가 GDP다. 한 나라에서 일정기간 생산된 최종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가치를 말한다. 두 가지 방법으로 계산하는데, 가계의 지출을 모두 합하거나, 기업이 지급하는 총소득(임금·지대·이윤)을 모두 더한다. 한 국가에서 구성원의 지출과 소득은 동일하므로 어느 방법이나 상관없다. 어떤 거래든 사는 사람이 있으면 파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상카가 널빤지로 푸시카트를 만들어 데리스에게 20달러에 팔았다면, 상카는 20달러의 소득, 데리스는 20달러의 지출을 기록한다. 자메이카의 GDP는 총소득이든 총지출이든 20달러 증가한다. 이런 식으로 자메이카가 1987년<표1>에 올린 GDP는 27억달러로 147개국 가운데 96위다. 푸시카트 대신 수백개 부품이 들어가는 자동차를 만들었다면 그 가치만큼 GDP도 뛸 것이다. 미국의 GDP가 자메이카의 1823배에 이르는 이유 중 하나다. 국민의 후생수준은 1인당 GDP를 비교하는 게 더 정확하다. 같은 해 1인당 GDP는 인구가 적은 스위스, 아이슬란드가 선두이고, 자메이카 순위도 77위(1160달러)로 조금 오른다.
자메이카호는 고속질주할 수 있을까
데리스 팀도 캘거리로 날아가 본격 순위 경쟁에 돌입한다. 스위스, 미국 등 강대국팀은 이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하지만 웬일, 데리스 팀이 무섭게 기록을 단축해나간다. 처음 경험한 빙상연습장이 훈련 효과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국민소득 순위를 높이려면 봅슬레이 속도를 끌어올리듯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국민소득 차이를 생산성(productivity), 즉 한 단위의 노동 투입으로 국민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차이로 설명한다. 근로자 1인이 다양한 장비(물적자본), 많은 훈련(인적자본), 높은 기술(기술지식) 등을 갖출수록 생산성은 높아진다. 즉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지금 자본재(건물과 기계 등 생산을 위한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자원은 한정돼 있으므로 현재의 소비는 줄여야 한다. ‘한강의 기적’이 그랬다. 가계의 저축을 늘려 기업의 투자 재원으로 썼다. 고속성장의 그림자는 국민들을 때로 고통스럽게 했지만, ‘모든 선택엔 대가가 있다’는 경제학 기본원리는 진실이었다. 최빈국이던 한국은 1970년대 매년 1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GDP 15위(2013년)에 올랐다.
“네 꿈의 저택을 위해 달려”
자메이카 팀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아직 고민한다. 늘 과묵하게 훈련하던 율이 속내를 드러낸다. 언젠가는 출세해서 호숫가 저택에서 살 거라고. 상카가 면박을 준다. “꿈 깨. 그래봤자 판잣집 신세야.” 듣고 있던 주니어는 율 편을 든다. “내 아버지는 한 칸짜리 판잣집에서 시작했지만 이젠 킹스턴에서 제일 큰 저택에 살아. 율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나아져. 특히 자메이카에선.”
율과 주니어가 꿈꾼 ‘나은 세상’은 실현됐을까. 자메이카의 지난해 GDP는 148억달러(115위)에 머물러 있다.
1987년 7.7% 성장했던 자메이카 경제는 이후 마이너스 성장률을 오가며 질주를 멈췄다<표2>.
물론 GDP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1930년대 만들어진 GDP 산정기준은 건강과 행복 등 삶의 진짜 가치를 담지 못한다”(→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말한 GDP 산정 기준의 한계)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환경 훼손이 심한 광산개발권을 낮은 사용료에 허가했다면 GDP는 올라도 삶의 질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삶의 만족도, 수명 등을 기준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더니 자메이카는 3위, 한국은 68위였다.
‘쿨러닝’의 라스트신. 데리스와 친구들이 마지막 결전에 나선다. ‘헝그리 정신’으론 여기까지였을까. 낡은 썰매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힌다. 네 사람은 썰매를 들고 코스를 완주한다.
김유미 한국경제신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