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동심 그리고 향수…키덜트 마케팅, 지갑을 열다

입력 2014-04-11 16:51

프라모델(plamodel·플라스틱 조립식 모형 장난감) 전문점 앞에는 매장에 재생되는 만화영화에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10대지만 20~30대도 상당수 눈에 띈다. 이들은 성인이지만 어렸을 적 향수를 찾는 ‘키덜트족’이다. 프라모델은 평균 10만원이 넘는다. 하지만 키덜트족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수집한다. 프라모델 마니아인 이명선 씨(32)는 “관심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건담 프라모델이라도 수많은 버전이 있어 계속해서 구매한다”고 말했다. 키덜트족은 이제 기업의 새로운 마케팅 타깃으로 부상했다. 능동적으로 삶의 재미와 여가 활동을 추구하는 20~40대로 경제적 여유까지 갖춘 신 소비계층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등장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선진국과 중국에서도 공통 현상이다. 프랑스의 경우 키덜트 축제가 있을 만큼 키덜트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어린 시절 감성 간직

스마트폰은 물론 태블릿 PC에도 토끼 귀가 튀어나온 커버를 씌우거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모으는 성인들이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요즘 유행하는 패션디자인에서도 후드티에 동물 귀나 날개 모양이 달려 있는 상의 등이 인기를 끈다. 어린 시절 ‘붕붕카’를 연상시키는 폭스바겐 비틀 ‘미니’의 인기도 키덜트의 영향이다. 일본 닛산의 ‘큐브’, 기아의 ‘쏘울’ ‘레이’ 등 귀여운 차량 디자인도 모두 키덜트 감성을 보여준다.

키덜트는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다. 어른이지만 여전히 어렸을 적 감성을 간직한 성인들을 일컫는다. 20~40대의 성인들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여러 가지 향수를 잊지 못하고 그 경험을 다시 소비하고자 하는 현상이다. 영화 소설 패션 애니메이션 광고 등 소비문화 전 영역에서 문화 신드롬으로 확산되고 있다.

키덜트의 특징은 유치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 키덜트란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른’ 같은 부정적 뉘안스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최근 키덜트족을 ‘능동적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경제적 여유+재미 추구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만화영화나 물건을 보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이 푸근해지기 마련이다. 이에 착안해 향수를 자극하는 키덜트 마케팅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소비력을 갖춘 어른들의 향수 자극은 기업에 매우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 됐다.

프라모델, 무선 조종 자동차, 애니메이션 캐릭터 제품 등이 주요 키덜트 상품이다.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키덜트족의 관심분야(복수응답)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이 1위를 차지했고 프라모델(27.6%)이 뒤를 이었다. 이 밖에 무선 자동차와 비행기가 18.9%, 캐릭터 제품(푸우 헬로키티 등)이 18.2%였다. 피규어와 미니어처(17.1%), 퍼즐(13.5%)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관련 산업도 급성장하고 있다. 국내 키덜트 산업 시장 규모는 연 5000억원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700억원이 로봇 자동차 비행기 장갑차 모형 등을 통칭하는 프라모델 산업이다.

인형 수집도 더 이상 아이들만의 취미가 아니다. 실제 모형을 정교하게 축소해 만든 일명 피겨는 개당 수십만원을 호가하지만 경제력 있는 어른들의 고급 취미가 됐다. 피겨 수집과 관련된 동호회만도 전국에 300개 넘게 활동 중이다.

패션·영화·대중음악계도 주목

키덜트 문화가 부쩍 주목받는 이유는 관련 산업뿐만 아니라 타 산업에서도 키덜트 코드가 ‘대박’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영화·대중문화계에서도 키덜트 감성을 자극하는 전략으로 상품 흥행을 유도한다.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업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키덜트 코드를 활용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들도 브랜드 특유의 디자인 전통을 깨고 애니메이션 그래피티 제품을 내놓는가 하면 동물 모양을 넣은 가방 의류 등을 선보이면서 귀여움을 강조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콘셉트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이지만 이례적으로 성인 관객층이 두터웠다. 가족 관객뿐만 아니라 20~30대 관객도 많아 전체 성인 관객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소녀시대’ ‘크레용팝’ ‘카라’ 등 걸그룹의 인기 역시 키덜트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이들 인기의 주소를 ‘삼촌팬’이라고 불리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 남성들의 전폭적 지지에서 찾을 수 있다. 걸그룹 소속사 역시 기획 단계부터 새로운 문화 주체로 떠오른 20~30대 남성을 염두에 둔다고 밝히기도 했다. 삼촌팬들은 소속사의 주식을 매입해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걸그룹 문화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성인용 완구에 열광…중국의 키덜트는 ‘소황제’가 주역

중국의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소황제’가 떠오르고 있다. 소황제는 중국 정부의 인구 팽창 억제정책으로 1979년 이후 독자로 태어나 황제처럼 자라온 세대를 일컫는다. 신소비층으로 주목받고 있는 ‘1세대 소황제’들은 1980년대 태생으로 현재 20대 중반~30대 초반이 됐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해외 브랜드 소비 경험이 많고 해외 유학과 여행 경험 등이 풍부하다. 경제·사회적으로 독립할 나이가 된 이들은 주택 가전 패션 금융 여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구매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키덜트 문화와 사치품 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으로 등장했다. 중국에서 키덜트 제품은 주로 스트레스 해소용과 완구·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이다. 주로 온라인으로 구매하며 한국과 일본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은 아직 상품이 적어 대부분 성인은 아동 애니메이션을 찾는다.

또한 소황제들의 부모 세대는 자녀들을 ‘샤오바오바오(小寶寶·귀염둥이의 애칭)’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주려는 경향이 강하다. 1990년대 태생인 ‘2세대 소황제’ 역시 사치품과 고가품을 선호해 중국의 사치품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 차이푸품질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인들이 사들인 전 세계 사치품 총액은 1020억달러로 전 세계에서 팔린 사치품(2070억달러)의 47%를 차지했다. 중국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사치품 소비국으로, 2015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사치품 소비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