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상품만 팔면 끝?…기업 존재 이유에 물음표 던진 CEO

입력 2014-04-08 21:46
수정 2014-04-09 10:52
CEO 오피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직원 복지가 최우선
매출 많은 매장 1층에 사내 반대에도 어린이집…부부동반 여행 100만원 지원

인문주의 경영 힘 쏟아
"인간 알아야 미래 만든다" 대학에서 인문학 강연…콘서트 등 문화 마케팅도


[ 유승호 기자 ] “삶이란 무엇일까요.”

지난해 12월 서울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10층 대강당.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계열사 신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삶의 의미’를 물었다. 신임 임원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 부회장이 경영 현안이나 임원의 역할이 아닌 ‘인생’을 주제로 ‘선문답’을 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정 부회장은 고(故) 김태길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소개하며 강연을 이어갔다. 이 책의 첫 장은 △건강 △생활의 안정 △자아의 성장 △공동체 내에서의 떳떳한 구실 등을 ‘행복의 조건’으로 꼽고 있다. 정 부회장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며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기업 경영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 넘어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정 부회장의 경영철학은 뚜렷하다. 항상 기업의 존재 이유를 ‘고객과 직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기업은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고 고객을 행복하게 하려면 직원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정 부회장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2009년 말 총괄 대표이사로 경영 일선에 나서자마자 임직원 복리후생을 강화했다. 그는 2010년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 1층에 회사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만들어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스타벅스 매장이 있던 자리였다. 단위면적당 가장 높은 매출을 낼 수 있는 1층에 어린이집을 짓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 부회장은 사원 복지가 우선이라며 스타벅스를 2층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어린이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신세계 임직원은 법으로 보장된 출산휴가(90일)와 육아휴직(1년) 외에 출산휴직과 희망 육아휴직을 합쳐 최장 2년8개월간 출산 및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20년 이상 근무한 임직원에게는 퇴직 후에도 자녀 학자금을 지원한다.

과장 이상 임직원은 1년에 한 번씩 부부 동반으로 부산 조선호텔에서 2박3일간 머물 수 있는 특전을 누린다. 숙박비와 아침식사, 사우나, 피트니스센터 이용권 등을 포함해 100만원이 넘는 비용을 회사가 지원한다. 지난 7일부터는 양가 부모도 이용할 수 있도록 혜택 범위가 확대됐다.

정 부회장은 ‘고객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유통업을 재해석하고 있다. 그는 신세계가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고객의 행복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기업’이 그가 내세우는 신세계의 비전이다. 백화점 대형마트 등으로 구분되는 기존 유통업의 관점에서 벗어나 쇼핑은 물론 외식, 문화생활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평소 “유통업은 야구장, 테마파크와 경쟁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업종과 상관없이 누가 소비자의 시간을 더 많이 점유하느냐가 경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이 본점 옥상에 야외정원을 조성하고 부산 센텀시티점 옥상에 공룡을 주제로 한 쥐라기 공원을 만든 것도 야구장과 테마파크 이상의 즐거운 경험을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인문학·문화예술이 경영의 바탕

정 부회장은 인문학과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다. 단순히 취미로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통업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인문학과 문화예술은 사람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최근 인문학을 더욱 중시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는 지난 2월 신입사원 면접을 봤다. 면접을 마친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만 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정 부회장은 “학생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매몰돼 인간과 세상에 대해 성찰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며 인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8일 연세대에서 열린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 ‘지식향연’이다. 정 부회장은 이 행사에서 강연자로 나서 “사람의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것이 인문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며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통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부회장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경영을 하지 않았으면 피아니스트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취미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던 그는 2007년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은 신세계백화점의 문화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정 부회장은 2010년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문화 마케팅을 본격화했다. 그해 10월부터 매주 토요일 VIP 고객을 초청해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상·하반기 한 차례씩 국내외 유명 연주자를 초청해 ‘신세계 클래식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고객제일’

정 부회장이 멘토로 삼고 있는 사람은 외할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19층 정 부회장 집무실에는 ‘顧客第一(고객제일)’이라는 외할아버지의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신세계 한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선대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직관력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했다. 정 부회장은 지난달 11일 경기 용인시 신세계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신입사원들과의 ‘공감 토크’에서 “고객의 잠재된 욕구까지 읽어내 고객이 요구하기 전에 한 발 먼저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고객제일의 의미를 설명했다.

외할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정 부회장에게 전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은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다. 정 부회장이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경영자가 되려면 인문학을 공부하고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 것도 이 회장이다. 아버지인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도 든든한 후원자다. 정 부회장은 신규 점포 개설 등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때 정 명예회장에게 조언을 구한다.

정용진 부회장 프로필

△1968년 서울생 △경복고,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 △신세계 전략기획실 대우이사(1995) △신세계 기획조정실 상무(1997)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사장(2000)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회장(2006) △신세계·이마트 대표이사(2010) △신세계그룹 부회장(2013)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