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선진화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한창이다. 국회선진화법은 의석 수가 많은 정당이 수적 우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소위 다수당의 날치기 법안처리 시도와 이를 몸으로 막는 소수당 간 물리적 충돌을 막자는 취지다. 2012년 새누리당이 주도해 발의한 법인데 실제 이런 이름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이런 내용을 담은 국회법 조항을 가리키는 말이다.구체적으로는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요건을 강화해 천재지변이나 전시 사변 등이 아니면 불가능하게 했다. 상임위 3분의 1 이상 의원이 쟁점법안에 대해 안건조정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면 최장 90일간 논의할 수 있고 의결은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원하면 최장 100일까지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도 가능하다. 법안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신속처리대상안건제도가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새누리당은 이런 국회선진화법이 야당에 의해 악용돼 국회가 사실상 식물화되고 있다며 이의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새누리당이 주도해 만든 법을 이제 와서 다시 고치자는 게 말이 되냐며 반대하고 있다.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알아본다.
찬성 “국회 마비…헌법·다수결 원칙에도 위배”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회선진화법이 국회 마비법이 되지 않도록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이른 시일 내에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여야간 이견이 없는 무쟁점 법안에는 상임위원회 소위 단계에서부터 그린리본을 달고 국회의장이 특정한 날을 지정해 그린라이트법을 본회의에서 처리하자”는 제안도 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국회선진화법으로 폭력이 사라졌으나 의회 중심의 협의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해 그 취지를 지키면서도 효율성을 높여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원로 헌법학자인 김철수 헌법개정자문위원장은 “좋은 의도로 도입됐지만 여야간 합의가 안되면 아무것도 못한다”며 “국회선진화법이 헌법이나 다수결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어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기준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여야간 이견이 없는 법안도 야당이 다른 법안과 연계해 반대하면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집권 여당이 책임지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데 고비마다 중요한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시행이 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초연금법이나 원자력 방호법 등 국민 복지와 국익을 위해 꼭 통과되어야 하는 법들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것도 선진화법 때문이라며 국익 차원에서도 이 법은 개정돼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반대 “법안 통과 잘 돼…정부·여당 불통이 문제”
새정치민주연합은 당초 2012년 선진화법을 발의할 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던 박근혜 대통령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법안 통과에 적극 찬성해 놓고 이제와서 여당 마음대로 국회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불과 2년도 안돼 다시 법을 고치자는 건 말이 안된다는 입장이다.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정부 여당의 불통이 근본적 문제인데 모든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원자력 방호법처럼 여야간에 견해 차이가 거의 없는 법안조차 국회 통과가 안된 것에 대해서도 “여당이 게을러서 못 챙긴 법안”이라며 지난 2년간 한 번도 이 법을 중점 법안으로 내세운 적 없는 새누리당이 이제와서 야당 탓만 한다고 비판했다.
문병호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 수석부의장도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돼 국회가 점거 농성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 않고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여야가 합의하에 많은 안건을 잘 처리하고 있다”며 국회가 마비되고 있다는 여당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여당이 선진화법 개정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일방 날치기를 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저희는 반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심을 잡기 위해 이 법 통과를 밀어붙이더니 이제와서 필요성이 없어지자 다시 개정하자는 것은 정치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개정에 반대하기도 한다.
생각하기
국회의 법안 처리에 필요한 정족수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정하는 바가 조금씩 차이는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일반 법안이나 국회 동의에 대해서는 과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다수결 원칙에도 부합한다.
다만 어느 나라나 중대한 법안이나 의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보다 엄격한 3분의 2 이상 찬성 등의 보다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결과적으로 국회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찬성이 없으면 어떤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는 현행 국회법은 분명히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한 정당이 의석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하지 않는 이상 늘 국회는 공전되고 시급한 법안은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다수당의 날치기나 이를 육탄으로 저지하기 위한 몸싸움은 없어져야 한다. 국회선진화법은 이런 부분을 없앴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역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날치기와 국회폭력이 없어져도 국회가 제 일을 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문화의 성숙이다. 대화와 타협, 상대방의 의견을 진심으로 귀를 열고 듣는, 그런 민주정치 교육과 정치문화 선진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 전에는 제도를 어떻게 고치더라도 공전하는 국회, 식물국회를 면하기 힘들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st@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