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선 / 장진모 / 김보라 기자 ]
미국이 1990년 걸프전쟁 이후 24년 만에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셰일혁명’에 따른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천연가스와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셰일가스·오일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미국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슈퍼 파워’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번 방출 결정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방출하려는 비축유는 러시아가 주로 수출하는 유황 함유량이 높은 원유(sour crude oil)라는 점도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美, 러시아 견제 가속화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5일 “크림 사태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전략 무기로서 미국이 가스를 공급하는, 에너지 외교의 새 시대를 알리는 전조”라고 보도했다. 20세기에 중동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로 패권 경쟁을 벌였다면 이젠 셰일에너지가 세계 정치·외교·안보 지형을 바꾸는 ‘전략 무기’로 국제무대에 본격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방출량은 전체 비축량의 1%가 채 안 되는 규모지만 러시아에 상당한 시그널을 던져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마이클 위트너 소시에테제네랄 글로벌 원유리서치 대표는 “이번 비축유 방출의 타이밍 자체가 러시아에 대한 경고 성격이 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국과 러시아 간 ‘신냉전’ 기류와 관련해 크리스토퍼 헬먼 포브스 에너지담당 전문기자는 “1980년대엔 군비 경쟁이 소련을 붕괴시켰다”며 “2010년대엔 미국의 에너지 붐이 푸틴을 파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셰일혁명’은 이미 유럽 정세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이 카타르 등의 천연가스 수입량과 자국 내 석탄 사용을 크게 줄이면서 남아도는 물량이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90%에 육박하던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최근 60%로 낮아졌다.
미국, 중동 외교 역학 구도 바뀌어
셰일혁명 이후 외교·안보 지형이 눈에 띄게 급변하고 있는 지역은 중동이다. 이란을 ‘P5+1(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독일)’과의 핵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건 단연 셰일혁명의 공으로 꼽힌다. 풍부한 셰일오일을 고려할 때 미국과 서방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차단하는 강력한 봉쇄 정책을 실행해도 석유파동이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랜 동맹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는 금이 가고 있다. 중동에 대한 석유 의존도가 낮아진 미국은 군사 개입을 원하는 사우디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사태 및 이란의 핵처리 등 중동 정세에 깊숙이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다.
사우디가 최근 프랑스와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헤즈볼라 세력 억제를 위해 레바논 정부에 30억달러의 무기 지원에 나선 배경이다. 이란과 화해 무드를 보이는 미국에 이스라엘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모세 야론 국방장관은 지난달 28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안보 콘퍼런스에서 “미국은 중동에서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교수는 “이라크전으로 인한 피로감이 큰 데다 셰일혁명으로 중동 원유 의존도가 약해지면서 미국의 외교 역학구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가 중동에 대한 관심을 줄이는 대신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중심축 외교(Pivot to Asia) 전략에 치중하는 것도 셰일혁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산유국 입지 좁아질 듯
‘셰일혁명’이 가속화할수록 전통적인 에너지 생산국의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오바마 정부의 국가안보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가 지난달 내놓은 ‘에너지 러시’ 보고서는 셰일혁명으로 국제석유·가스 가격이 내려가면 러시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 베네수엘라 등 천연자원이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대국가(Rentier State)’가 상당히 압박받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는 배럴당 110달러 수준이 유지돼야 재정수지를 맞출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셰일가스·석유 붐과 관련해 생산자 및 소비자 관점의 단순한 논의에서 벗어나 외교정책 수단으로의 활용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국가안보회의 에너지 분야 고문이었던 로버트 맥널리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외교정책이 ‘민주주의 병기창’에서 ‘에너지 병기창’으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병기창’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1940년 표방한 것으로, 전체주의 국가들의 공격에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연합국에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는 외교정책 기조다.
이정선 기자/워싱턴=장진모 특파원 sunee@hankyung.com
셰일 붐이 이끄는 美 ‘제조업 르네상스’
美 가스요금 유럽의 3분의 1
제조업 유턴으로 실업률 하락
해외기업도 속속 미국행
미국이 셰일혁명으로 에너지 패권을 되찾으면서 세계 경제 지형도 바뀌고 있다. 미국을 떠났던 제조업체가 돌아오는 ‘리쇼어링(reshoring)’은 물론 외국 기업까지 속속 미국행을 택하면서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던 미국이 ‘세계의 굴뚝’ 지위마저 넘보는 모습이다. 미국은 셰일매장량 13조6500억㎡로 세계 4위지만 수압파쇄법 등 첨단 채굴 기술을 보유해 글로벌 셰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셰일 붐으로 가장 먼저 반사이익을 누린 것은 일자리 시장이다. 금융위기 이후 5년간 8~10%대를 기록하던 실업률은 현재 6%대로 떨어졌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미국 셰일 붐으로 2020년까지 17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국내총생산(GDP)은 연 6900억달러(약 738조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내 에너지 가격이 하락하면서 제조업은 날개를 달았다. 석유화학업종이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미국 내 에탄 가격은 2011년 갤런당 91센트에서 올해 26센트 선으로 떨어졌다. 셰일가스 덕에 미국의 전기요금은 유럽의 절반 수준, 가스 가격은 유럽의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글로벌 석유화학 업체들의 공장은 발빠르게 미국행을 택했다.
석유화학 업체 외에도 제조업 공장이 미국으로 돌아오는 리쇼어링이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모토X를 텍사스 포트워스 공장에서 조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애플도 지난해부터 중국을 떠나 신형 아이맥을 미국 내에서 생산하고 있다.
김보라 한국경제신문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