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봄·봄·봄
내려앉는 눈꺼풀, 눈꼴신 저 커플…찬란해서 더 가혹한 봄날의 햇살이여…
골프·캠핑…달콤피곤한 주말
상사 모시고 필드 나가야하고 가족들 성화에 바비큐 굽고…
잠에 취하는 '잠잠한 날' 그리워
[ 임현우 기자 ]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눈부시게 화창했던 지난 일요일. 유통업체에 다니는 ‘골드 미스’ 윤 과장은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벚꽃 엔딩’을 스마트폰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 제주 7번 올레길을 묵묵히 걸었다. 노래 가사에선 둘이 걷는다고 했지만 그녀는 홀로 뚜벅이며 걸었다. 고기국수, 흑돼지, 마라도 짜장면 등등 제주 맛집도 주말 동안 혼자서 섭렵했다.
이런 모습 좀… 궁상맞지 않느냐고? 유난히 계절을 타는 윤 과장에게 이런 주말 여행은 봄을 맞는 하나의 ‘힐링’이자 ‘의식’과도 같다.
“이렇게 좋은 날 집에 있음 더 울적하잖아요. 햇빛만 보면 괜히 두근두근해요. 사춘기 때는 오히려 조용했는데 30대 중반 접어들고 더 봄을 타는 것 같아요.”
○서른 즈음이라 더 울적한 봄
일조량 증가→기온 상승→체온 상승→근육 이완→세로토닌 호르몬 분비 촉진→감정 변화. 현대 의학은 사람들이 봄을 타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그런데 증권사 정 대리가 요즘 심하게 감성적인 건 꼭 세로토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스물아홉 꽃처녀인 그녀에게 이번 봄은 ‘20대에 맞는 마지막 봄’이라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떠나가는 20대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까지 더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얼마 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는데 예전과는 달리 눈물이 주루룩 나는 거 있죠.”
정 대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해결책을 ‘몸을 가만 놔두지 않는 것’에서 찾았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봄 마라톤에 참가신청을 했고, 주말마다 서울 홍대 인근에서 춤을 배우는 스윙댄스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대학 선후배 중 싱글녀들끼리 똘똘 뭉쳐 전국 맛집을 탐방하는 ‘식신원정대’도 조직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직장 동료들은 걱정스런 눈치다. “자꾸 싱글녀들끼리 뭉쳐 다니면 남자 더 못 만나는데…. 정 대리는 지금 돌아다닐 게 아니라 소개팅을 해야 돼요.”
○벚꽃이 지기 전 사랑을 만들리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싱글들의 연애세포를 자극한다. 서울 여의도에서 일하는 3년차 직장인 K는 “이달 안에 어떻게든 여자 친구를 만들겠다”며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소개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입사 이후 봄에는 늘 솔로였다는 그는 매년 4월 열리는 윤중로 벚꽃축제에 바글바글 몰려드는 커플들을 바라보며 ‘난 무엇을 위해 일만 하고 사나’하는 공허함에 시달렸다고. K는 여자들 외모를 깐깐하게 따졌던 외모지상주의(?)를 버리고 “이달엔 어떻게든 눈을 최대한 낮춰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홍보회사에 다니는 27세 싱글녀 Y도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하단다. ‘썸남(사귀는 건 아니지만 마치 곧 사귈 듯 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남자)’이 될 만한 남자들과 메신저를 주고받는 횟수도 부쩍 늘었다고. “결혼 시즌이라 슬슬 청첩장도 밀려들어서 기분이 더 꿀꿀해요. 조건 안 따질 테니 누가 나 좀 확 끌어주면 안 되나?”
○주말에는 좀 쉬고 싶어요
봄을 맞아 감수성이 샘솟는다는 건 어찌보면 젊다는 증거일 것이다. 40대 유 부장에게 봄이란 ‘주말이 사라지는 피곤한 계절’이다. 겨우내 잠잠했던 골프 접대 약속이 빽빽이 차면서 유 부장의 토요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부터 가족들 깰까봐 주섬주섬 눈치 보며 나오는 것도, 상사를 픽업해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것도, 거래처 손님들을 모시고 골프를 쳐야 하는 모든 것이 적잖은 스트레스”라고 털어놨다.
유 부장은 종합비타민과 홍삼농축액을 잔뜩 챙겨 먹으며 체력 비축에 나섰다. “해가 갈수록 일정은 빡빡해지는데 춘곤증은 왜 이리 심해지는지…. 아! 세월이 무상합니다.”
결혼 2년차 워킹맘 P 역시 따뜻해지는 날씨가 두렵다. 소문난 ‘캠핑광(狂)’인 남편에게 전국 방방곡곡을 끌려다닐 판이어서다. 신혼 때 캠핑 재미에 눈을 뜬 P의 남편은 성과급을 몽땅 쏟아부어 캠핑용품을 사더니만, 토요일마다 P를 깨워 캠핑장으로 향한다. “잠 좀 자게 놔둬!” “혼자 가!”라고 발버둥(?)쳐봤지만 남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늘 무릎을 꿇는다고.
“이젠 그냥 순순히 따라가요. 남편이 깨우면 ‘응, 알았어’ 하고 좀비처럼 일어나 조수석에서 부족한 잠을 자죠. 그래도 막상 캠핑장에서 맑은 공기 쐬면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고…. 좋긴 좋더라고요. 땀 뻘뻘 흘리며 바비큐 구워주는 남편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결론은 남편 자랑인 것인가.
○봄 신상 자랑하고 가실게요
봄이 되면 여성들의 옷차림도 가볍고 화사해지기 마련. 하지만 자칭 ‘패셔니스타’를 자부하는 A의 올봄 콘셉트는 사내에서 이런저런 입길에 오르고 있다. 잔뜩 쇼핑해 둔 올봄 신상품들을 과시하듯 A는 매일 화려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무심한 듯 시크하면서도 쿠튀르적이면서 과감한 노출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옷차림이 보수적인 분위기의 이 회사에선 ‘투 머치(too much·과하다는 뜻)’라는 것.
“100m 밖에서도 알록달록한 A를 딱 알아볼 수 있으니 편하긴 한데요. 여기는 밀라노가 아니고 광화문인데 좀…. 그렇다고 여자 후배에게 ‘덜 파인 걸 입으라’고 말하기도 곤란하고. 어쩔 수 없죠.”
백화점에서 일하는 34세 유부남 박 과장은 봄옷 사느라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고 하소연한다. 비즈니스 캐주얼이 정착된 지는 꽤 됐지만, 새로 취임한 최고경영자(CEO)가 옷을 ‘잘’ 입으라고 강조하고 있어서다. “고객들에게 패션을 파는 회사인 만큼 직원들부터 스타일이 남달라야 한다”는 CEO 메시지가 떨어진 이후 이 회사 남자 직원들의 의복비 부담이 확 늘어났다고.
“다들 멋스럽게 입고 일하니 사무실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그런데 남자 옷도 멋진 건 다 비싸다고요 ㅠㅠ. 애들 학원비에 월세도 곧 오를 텐데. 계절 바뀔 때마다 부담이 좀 많아질 것 같네요.”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