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뉴턴도 20억원 손해 본 남해회사 버블…배경엔 정부 있었다

입력 2014-02-28 21:25
수정 2014-03-01 03:39
스토리&스토리

세계 경제를 바꾼 사건들 (23) 英 남해회사 주식투기 사건

주식시장 발달하던 18세기 英 남해회사, 무역독점권 획득

부채 많아진 정부와 거래 통해 증자·주식 발행권 얻는 대신 3200만 파운드 국채 인수

경쟁회사 막는 버블법 제정 후 남해회사에 투자열기 꺾여
1720년 128파운드였던 주가 1년 만에 9배 올랐다 폭락



“나는 천체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다.”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이 주식 투자로 거액을 날린 뒤 한 말이다. 이 말은 그 이후 생겨난 이른바 ‘버블’을 설명할 때 빼놓지 않고 회자되는 문구다. 세기의 천재인 뉴턴에게 2만파운드(약 20억원)라는 거액의 손실을 안긴 사건은 근대 3대 투기사건 중 하나로, 1720년에 발생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버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거품 경제(bubble economy)’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남해회사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천당’과 ‘지옥’을 1년 만에 모두 경험하게 된다. 1720년 초 128파운드에 거래되던 이 회사의 주식(액면가 100파운드) 가격은 그해 5월 700파운드로 급등한다. 그 후 6월24일 1050파운드까지 고공 행진을 이어가다가 그해 12월 100파운드대로 폭락한다. 6월의 최고 수준과 비교하면 90% 가까이 폭락한 것이다. 이 급격한 주가 변동만을 놓고 본다면, ‘묻지마 투자’ ‘인간의 탐욕과 광기’가 빚어낸 버블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주식 투기의 대명사가 돼 버린 남해회사 버블 사건을 비롯한 투기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에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투자행위를 비이성적 충동이나 단순한 인간과 시장의 탐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다 보면 사건의 진짜 주인공일 수 있는 정부나 공직자, 그리고 정부의 실패 등에는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남해회사가 설립된 18세기 초 영국에선 이미 주식시장 시스템이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다. 1700년께 주요 주식거래소에 주식 가격과 정보를 알려주는 통신사도 생겨났다. 1688년 주식회사 3곳만 있던 런던주식시장에 6년 뒤인 1694년엔 53개의 주식회사가 이름을 올렸다. 18세기 초반 또다시 주식회사 설립 붐이 일었고, 1720년이 되면 200여개의 주식회사가 존재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회사가 바로 남해회사였다.

남해회사는 1711년 존 블런트와 조지 카스웰 등 일단의 은행가에 의해 설립됐다. 당시 영국은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며 정부 부채가 크게 늘어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 정부의 국채는 총 1000만파운드에 달했다. 남해회사는 주식발행을 통해 국채 900만파운드를 인수하면서 정부로부터 연리 6%를 보장받는 한편 ‘남해 지역’의 무역독점권을 획득한다. 여기서 남해(South Sea)는 일반적으로는 남미 지역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오리노코(Orinoco) 강부터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까지의 남미 동해안 지역과 전체 서해안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자원과 노예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었다.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의 국채를 인수해 연 54만파운드의 이자 수입을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남해 지역의 무역독점권까지 따냈다. 여기에다 영국 정부는 무역독점권 특혜가 활용될 수 있도록 배 4척도 제공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사람들은 남해 지역에서 노예무역 우선권을 갖고 있는 스페인과의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해 스페인을 이곳에서 몰아낼 것으로 기대했다. 전쟁은 1713년에 끝났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스페인 특권이 완전히 배제된 게 아니라 약간 제한될 뿐이었다. 남해회사의 첫 항해는 1717년이 돼서야 시작됐다. 그것도 배 한 척만이 허용됐다. 남해회사는 곤경에 처했다.

한편 영국 정부는 다시 발발한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해 부채가 급격하게 쌓여갔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남해회사는 1720년 초반 어려움에 처한 영국 정부에 대해 매력적인 제안을 한다. 만일 회사 자본을 무한정으로 증자할 수 있고, 또 원하는 가격에 주식을 발행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낮은 이자인 연리 5%로 국채 3200만파운드를 인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드디어 왕의 재가를 통해 회사는 3200만파운드의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사람들은 앞다퉈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였다. 의회 논의 과정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잉글랜드은행을 제치고 남해회사가 선택된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 회사 투자에 적극 나서게 만들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는 128파운드에서 160파운드로 뛰었다. 회사는 4회에 걸쳐 주식을 발행한다. 1, 2차는 1720년 4월 각각 발행가 300파운드와 400파운드, 3차는 6월 발행가 1000파운드, 그리고 마지막 4차는 8월 발행가 1000파운드였다. 발행된 주식은 두세 시간 만에 소진될 정도였다.

당시 남해회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회사의 주가가 동반 상승했고, 이는 새로운 회사의 설립을 촉발시켰다. 남해회사는 새로운 회사의 등장을 꺼렸고, 이에 의회는 그해 6월 주식 상장을 어렵게 하고 본래 사업 목적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버블법(The Bubbl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남해회사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거품이 꺼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4개의 회사에 대한 법률위반 영장이 주가 하락의 신호탄으로 작용한 것이다. 거품은 곧 꺼져 버렸다.

남해회사는 발행 주식을 국채와 바꿔주는 신종 금융기법 ‘인그래프트먼트(engraftment)’를 도입했다. 또 전쟁 승리와 무역독점을 통한 막대한 이윤의 예상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혁신과 모험의 결과를 미리 안다면 애초에 그런 버블은 있을 수 없는 법. 미래에 대해 인간의 무지는 구조적이다. 게다가 방만한 재정, 독점권 등 특혜 부여, 뇌물 등이 거품을 비정상적으로 키웠다. 그러나 모든 책임은 남해회사의 부담으로 남았다. 남해회사 버블의 최대 수혜자는 막대한 손해를 본 투자자들의 돈으로 부채를 털어버린 정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