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전남북 및 광주 지역 내 가금류 등에 대해 스탠드스틸(Standstill) 명령 발동.’(1월18일자 농림축산식품부 보도자료), ‘포트홀(Pot Hole)을 줄이기 위해 중앙과 지방이 뭉쳤다.’(국토교통부 1월23일자 보도자료)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를 영어가 정부 보도자료에 버젓이 쓰이는 요즘이다. 스탠드스틸은 일시 이동중지요, 포트홀은 아스팔트에 파인 큰 구멍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다짜고짜 이런 말부터 들으면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말이든 글이든 영어가 섞이면 왠지 그럴듯해 보이는 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인가. 일상의 대화에서는 물론 회사명 제품명 음식점 이름은 물론 아파트 브랜드조차 영어가 온통 넘친다. 패션용어라는 걸 듣다 보면 도대체 조사말고는 한국말이 없을 정도다.
온 국민이 평생 영어 스트레스
정부가 사교육비를 잡겠다며 대입 수능에서 영어시험 문제를 쉽게 내겠다고 한다. 문항당 지문 길이도 줄이고 수능 시험지 분량도 축소할 것이라고 한다. 대입 자기소개서에 토익 토플 등 공인영어성적을 써 넣으면 점수를 0점 처리하겠다는 대책도 나왔다.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대통령은 “영어 사교육 부담을 대폭 경감해야 한다”며 학생들에게 과잉 영어 교육을 요구하는 교육현실에 대해 근본적 개선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영어 못하면 바보 취급하는 게 현실인데 한편에서는 영어 너무 잘하지 못하게 하란다. 세상에 이런 위선과 이중성이 또 어디 있나. 해외순방 때마다 대통령의 훌륭한 외국어 구사력이 회자되곤 한다. 한국은행 총재 자격을 논하면서 영어의 자유로운 구사능력을 넣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유학파 출신들이 커피숍에 끼리끼리 모여 영어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현장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한국에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이 실존한다. 그런데 영어시험 쉽게 낼 테니 영어공부 살살하라고? 잉글리시 디바이드를 고착화하겠다는 건가.
쉬운 수능은 사교육비 못 잡아
방법은 있다. 영어 공용화다. 영어 교육에 쏟아붓는 천문학적인 비용, 거의 전 국민이 평생 등짐처럼 지고 살아가는 영어 스트레스를 감안하면 공용화 이외에는 답이 없다. 물론 해묵은 논쟁거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론들도 많다.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교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비효율과 낭비 부작용 등을 감안하면 설사 문제점이 좀 있더라도 공용화를 하는 게 차라리 낫다. 언어는 문화와 사고의 총체적 반영체라며 공용화는 위험하다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분별하게 영어가 뒤섞여 쓰인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공용화를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면 그토록 바라는 노벨상도 훨씬 더 빠르고 쉽게 다가올 수 있다. 서비스산업도 훨씬 더 큰 시장을 상대로 날개를 펼 수 있다. 아니 이 모든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영어 사교육비를 줄이고 영어 교육기회 불평등을 줄일 수는 있다. 영어 사교육비를 잡는 방법은 대입 수능을 쉽게 내는 게 아니라 영어 공용화를 시행하는 것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