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부자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에 왜 예민한가

입력 2014-02-09 21:36
수정 2014-02-10 03:49
신흥국 '리디노미네이션' 실패
국민 공감대 형성이 성공 열쇠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동안 잠잠했던 ‘리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연되고 있다. 2000년 이후로만 따진다면 세 번째다. 종전과 다른 것은 테이퍼링(양적완화 규모 축소)을 첫 단추로 앞으로 본격화될 출구전략의 대응책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화폐가치에 변동을 주지 않으면서 거래단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현재 달러당 네 자릿수의 원화 환율을 세 자릿수나 두 자릿수로 변경하는 것이다. 2005년 이후 신흥국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추진했던 리디노미네이션은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특정국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 △거래편의 제고 △회계기장처리 간소화 △물가 기대심리 억제 △대외위상 제고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불안 △부동산 투기 심화 △화폐주조비용 증가 △각종 교환비용 등 단점도 만만치 않다.

테이퍼링 추진 이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연되는 것은 우리 경제 위상에 맞지 않는 원화 거래 단위로 충격을 더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하드웨어 면에서 한국은 이미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세계 270개국 가운데 소득규모(GDP)로는 14위, 무역액으로는 8위, 수출액과 시가총액은 각각 7위다.

하지만 부패도지수(CPI), 지하경제 규모, 조세피난처에 숨겨 놓은 검은돈 등으로 평가되는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부패도지수를 보면 지난해 조사대상 177개국 중 46위를 차지해 현 정부 들어 오히려 한 단계 뒷걸음질쳤다.

투자국 지위도 파이낸셜타임스지수(FTSE)로 선진국, 모건스탠리(MSCI)지수론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준선진국인 셈이다. 그러나 화폐 단위로 본다면 1달러에 네 자릿수 환율을 유지하고 있어 한국보다 경제발전 단계나 국제위상이 훨씬 떨어지는 국가에 비해 많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같이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자 위치에 있는 국가들은 최근처럼 대전환기에는 쏠림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좋을 때는 선진국 대우를 받아 외국자금이 대거 유입되다가 나쁠 때는 신흥국으로 전락해 들어왔던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큰 어려움이 닥친다. 이른바 ‘샌드위치 쏠림현상’이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재연되는 것도 외형상 선진국 지위에 맞게 부패를 척결하고 화폐거래 단위를 변경해 쏠림현상을 줄이자는 목적에서다. 같은 목적으로 2000년 이후 각국은 신권을 발생했다. 미국은 20달러, 50달러, 100달러짜리를 새롭게 도안했고, 일본은 20년 만에 1만엔, 5000엔, 1000엔짜리 신권을 발행했다. 신흥국도 앞다퉈 신권을 내놓았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신권을 발행해 목적을 달성한 국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기존 화폐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거래 단위를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진국들이 해당한다.

하지만 신흥국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을 결부시켜 신권을 발행했다. 그후 이 국가들이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대외위상 증가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가가 앙등하고 부동산 투기가 거세게 불면서 경제가 더 불안해졌다. 터키, 모잠비크, 짐바브웨가 그랬고 2009년에 단행했던 북한도 실패했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법화(法貨·legal tender) 시대에 신권을 발행하는 것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것은 없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에는 더 그렇다. 특히 경제활동 비중이 높은 부자들과 대기업의 저항이 크다. 이 때문에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신권 발행과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의 목적을 거둘 수 있다.

선진국들은 이 전제조건의 성숙 여부를 중시했지만 신흥국들은 위조지폐가 발견되거나 부패가 심하고 최근처럼 대규모 자금이탈이 심한 긴박한 상황에서 그것도 급진적인 리디노미네이션까지 병행했다. 전제조건 충족 여부보다 상황논리에 밀려 논의되고 추진됐다는 의미다. 바로 이 점이 결과의 차이다.

우리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커졌지만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액면 단위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기업회계에선 조(兆)원, 금융시장에선 경(京)원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원화거래 단위도 달러화의 1000분의 1로 여겨지는 등 경제 위상과도 맞지 않다.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테이퍼링 추진에 따른 금융불안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일종의 화폐개혁에 해당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거나 논의하는 그 자체도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성숙될 때 논의되고 추진해야 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