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주기 난관 돌파한 우리경제
가계부채, 양극화, 고령화에 발목
불확실, 불안정 파고 헤칠 지혜를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설을 앞두고 책장을 정리하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간 선배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걷기에 불편할 정도로 허리가 아파도 연구실에 나와 연구에 매진했던 분이었다. 함께 점심을 하려고 밖으로 나갈 때면 식당까지 거리가 여간 신경이 쓰였던 게 아니다. 훌륭한 연구업적을 많이 쌓으려면 튼튼한 척추가 제일 중요하다고 한 선배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척추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운동을 소홀히 하고 자세가 바르지 않은 탓이지만 근본적으로 신체의 약점이 숨어 있기도 하다. 척추는 신이 만든 인체의 다른 기관에 비하면 형편없는 해결책이다. 네다리로 걷는 동물과 달리 한 개의 기둥으로 전체 몸무게를 지탱하다 보니 척추에 부담이 가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인간이 직립보행 덕에 두 손을 자유롭게 쓰면서 도구를 만들고 다른 동물을 지배하게 된 대가로 척추에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이런 인간의 발전적 진화를 인지과학자인 개리 마커스 뉴욕대 교수는 ‘클루지(kluge·서투르고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진화가 최선의 선택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자연선택론에 제대로 반격을 가하고 있다.
클루지적 진화는 경제학자로서 자연선택론보다 더 공감이 간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다운 규모의 나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 진입을 앞둔 국가라고 강조해왔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압축 성장과 압축 민주화를 거치며 성장신화를 써왔는데,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신화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장담해왔다. 지난해에는 다양한 통계와 실증적 증거를 더해 ‘시크릿, 한국 경제 성장엔진 5’라는 책까지 쓰게 됐다. 하지만 반성하거니와 미래에 대한 전망 부분은 매우 취약하고 두루뭉수리하다. 잘했던 과거의 기세를 이어 앞으로도 잘하자고 끝맺었다.
한국 경제는 거의 10년 주기로 대대적인 구조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때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현실의 벽을 뛰어 넘었다. 그러다 보니 선진국의 복잡한 경제이론을 적용해 과거 경제를 설명하고 정교한 모형을 만들어 경제를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통계가 충분히 축적돼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계량통계 기법을 사용한 예측도 쉽지 않다.
최근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며 국제 학계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수십년간 신흥시장을 누비며 관찰해온 경제전문가인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신흥국총괄사장은 ‘브레이크아웃 네이션’이란 책에서 한국을 경제신화를 이어갈 금메달리스트로 치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또다시 구조적 저성장의 벽을 극복하고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지난주 세계 경제성장률을 0.1%포인트 상향 조정한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많은 기관들은 세계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한국 경제도 수출산업의 전망이 밝아지며 작년보다는 높은 성장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가계부채와 소득 양극화로 얽힌 내수침체, 노령화에 따른 복지수요 충족, 사사건건 발목 잡는 정치와 그로 인한 정책결정의 한계, 포화상태에 이른 국내산업 역량, 수렁에 빠진 일자리 창출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은 2000년 이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올해엔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이뤄진 미국의 비정통적 통화정책을 바로잡는 세계 각국의 격렬한 이해 조정이 이뤄질 것이다. 고위험 고수익 투자 증가로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진 상태에서 양적완화 축소 폭이 커지게 되면 한국 경제가 직면하게 될 위험은 더 커지게 된다.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인데 불확실성만 더 커진 것이다. 자연이 만든 ‘클러지’는 경제진화론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에도 적용된다. 뾰족한 대책이 없어도, 다소 어설퍼도 최선을 다해 최고의 창의력으로 각자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