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 1병영] 결혼 뒤 예상치 못한 군 입대…인내의 힘을 길렀다

입력 2014-01-16 20:43
수정 2014-01-17 04:49
나의 병영 이야기

1968년 시력 나빠 논산서 귀향조치…4년간 영장 없어 면제라고 생각해
결혼에 임신, 지방청 근무도 지원…사흘 휴가내 간 훈련소행이 3년 돼



1972년 3월, 입대통지서를 받고 어쩔 줄 몰랐다. “이를 어쩐다냐?”

나는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최말단 9급 산림공무원으로 발령받아 당시 국내 산간오지의 대명사인 무주 구천동에서 산간수 생활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무주에서 춘양, 영주를 거쳐 8급으로 승진해 영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안동지방산림청에 자리가 생겨 지방청 근무를 희망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이때 입대라니….

이미 1968년 3월, 입대통지를 받고 논산훈련소에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신체검사 결과 시력이 나쁘다고 해서 3일 만에 귀향조치를 받았다. 이듬해 결혼했고 영장이 나오지 않기에 군 면제가 됐나 보다 생각하고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갖기로 해 아내는 출산을 한 달여 앞둔 상태였다.

잠을 못 자며 고민하는 사이 안동지방산림청으로 발령이 났다. 아내를 영덕에 홀로 남겨둔 채 혼자 부임했다. 4년 전보다 시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나이는 더 먹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귀향조치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입대하는 날이 다가왔다. 사무실에는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3일간 연가를 냈다. 아내에게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신체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던 시간이 왜 그리 길고 지루하던지…. 그러나 귀향조치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12257222 훈병 조연환’ 내 가슴에 붙여진 이름표. 이를 어쩐단 말인가? 사무실에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아무런 대책 없이 먼 바닷가 부엌방에 홀로 떼어 놓은 만삭의 아내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4주간의 논산훈련소와 6주간의 군의학교 위생병 교육을 마치는 날 아내가 아들을 순산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눈물이 흘렀다.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51후송병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동료들은 좋은 곳으로 간다고 부러워했지만 좋은 줄도 몰랐다. 내가 배치된 곳은 51후송병원 제1의무대대 행정반이었다. 나이도 많고 결혼해 아들까지 있다고 해서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동갑내기인 내무반장에게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30분까지 고정으로 불침번을 서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간대 불침번은 모두가 싫어했다. 내무반장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불침번을 선 다음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오전 6시 기상 전에 돌아오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내무반장은 혼쾌히 허락해 주었다. 다음날부터 새벽 3시에서 4시30분까지 불침번을 서고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했다. 병원 영내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새벽기도를 하지 않아 부대 옆 ‘원주태장장로교회’로 다녔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머리를 숙이면 눈물이 절로 나왔다. 아내가 불쌍해서 울고 내 자신이 못나서 울고….

대대본부 내무반 분위기는 참 좋았다. 주말엔 오손도손 모여 앉아 교양강좌를 열기도 했다. 어쩌다 아내가 면회를 오면 아들 규식이를 서로 안아보고 과자를 사 주고 밥도 지어주면서 좋아했다. 숭실대 교수를 지낸 하정식 병장, 세무공무원인 이해수 병장, 행정반 선임인 이남수 상병, 부산 사나이 김동식 상병, 전입 동기인 김해식 상병, 내무반 귀염둥이던 제주 출신 김성홍 일병. 동료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 삶의 가장 힘들고 보람 있었던 군 생활 3년. 나는 병영생활을 통해 인내와 기도의 힘을 길렀다. 그 힘으로 제16회 기술고등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했고 제25대 산림청장까지 지냈다. 군 생활은 오늘의 나를 만든 용광로였다. 아내에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말이다.

조연환 <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前산림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