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봉 증권부 차장 kgb@hankyung.com
한국투자공사(KIC)의 투자 성적이 거론될 때는 ‘BoA메릴린치’가 늘 따라붙는다. 2008년 KIC는 20억달러 상당의 BoA메릴린치 주식을 샀다가 현재 가치로 9억달러의 평가손실을 냈다. 이 투자 건은 한국 연기금의 실패와 무능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굳어졌고, KIC는 감사원 감사나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KIC가 같은 기간 150억달러가량을 벌어들인 점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저기서 휘둘리는 연기금
국민연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 5년간 연평균 6%의 수익을 올렸는데도 개별 투자건의 손실이 발생할 때마다 ‘주먹구구식 투자’, ‘성급한 결정’이라는 등의 지적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 국감에서는 국민연금이 4년간 3조3000억원의 손실을 봤다는 비판이 나왔다. 운용사에 위탁한 자금보다 국민연금이 직접 굴린 자금의 수익률이 더 좋은 것으로 나오자 위탁 대신 모두 직접투자했다면 3조3000억원의 수익을 더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가정법을 동원한 논리적 비약이다. 이미 국민연금의 1인당 운용 규모가 다른 글로벌 연기금의 2배를 크게 웃돌 정도로 과도하다는 점은 간과했다.
그럼 정부나 정치권이 이렇게 주요 연기금의 투자에 핏대를 세우는 만큼 투자를 위한 전방위 지원을 해주고 있을까. 실상을 보면 별로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국민연금 등의 인프라 투자 수익률을 낮추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7~8년 전 인프라 확충에 다급했던 정부는 국민연금 등에 반 강제적으로 투자를 유도했다. 이제는 ‘폭리를 취한다’며 20~30년의 계약 기간을 무시하고 수익률 깎기에 골몰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수년째 추진하고 있는 헤지펀드 투자도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글로벌 연기금들엔 일반적인 상품임에도 무조건 ‘위험하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 또 다른 연기금 한 곳은 과거 정권 교체 후 정치권의 압박 때문에 특정 지방 기업에 투자를 늘렸다가 지금까지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멀기만 한 글로벌 플레이어 꿈
온갖 이해 당사자들까지 가세해 연기금에 으름장도 놓는다. 국민연금은 위탁운용사가 수익형 건물을 샀다는 이유로 한동안 세입자들의 시위와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의 민원에 시달려야 했다. 주요 연기금들은 인수합병(M&A) 관련 투자를 검토할 때마다 피인수 기업 노조를 등에 업은 노동단체들로부터 ‘중단하라’는 공문 세례를 받는다.
글로벌 투자 시장은 각국 연기금들의 전장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의 부를 내걸고 국경을 넘나들며 투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전 세계적인 고령화와 저금리 기조 속에서 마땅한 투자 상품을 찾는 게 지상 과제가 됐다. 투자 제한도 앞다퉈 풀고 있다. 보수적인 기금 운용으로 소문난 일본공적연금(GPIF)이 채권투자를 줄이고 해외 대체투자와 주식투자를 늘리겠다고 선언한 점도 이 때문이다.
국내 주요 연기금도 다양한 해외 상품군으로 투자 범위를 늘리고 있다. 연기금 고갈 논란의 해법 1순위가 ‘수익률 제고’에 있는 만큼 당연한 행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투자 다변화, 운용 독립성을 논의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국내에서도 여기저기 휘둘리며 ‘봉’이 되고 있는 연기금들이 글로벌 전장에서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고경봉 증권부 차장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