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해맞이 태백산행

입력 2014-01-06 20:42
수정 2014-01-07 03:42
벌써 몇 해째 새해 첫날은 태백산에서
정상에서 가져온 정기를 이글에 담아

오영호 < KOTRA 사장 youngho5@kotra.or.kr >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온다. 저마다 가슴에 소원을 품은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로 새벽 등반을 재촉한다. 두어 시간쯤 올랐을까. 장군봉과 천제단이 멀찌감치 눈에 잡힌다. 하지만 정상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 법. 능선을 가로지르는 칼바람이 산신령처럼 우뚝한 주목(朱木)들을 연신 할퀴며 흔들어대고, 운무(雲霧)를 벼랑 아래로 거칠게 몰아낸다. 거센 바람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정상에 발을 디딜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얼마 후 펼쳐지는 장엄한 일출. 희붐한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새해를 알리는 해가 둥둥 떠오른다.

벌써 몇 해째인가. 매년 새해의 첫날을 태백산에서 맞이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이 시작되던 그해, 속절없는 심정으로 처음 찾은 곳이 태백이었다. 공직에 몸담은 자로서 자괴감이 컸던 탓일까.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국가 위기 사태에 기도밖에 할 게 없다는 심정으로 천제단에 올랐던 것이다.

일출의 감흥을 가슴에 안고 천제단으로 향했다. 준비해온 술과 포를 제단에 올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경제가 활짝 기지개를 펴는 한해가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온 국민이 서로 배려하고, 포용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줄탁동시(啄同時)하면 반드시 소망이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아직 여물지 않은 부리로 사력을 다해 껍질을 쪼아대고, 그 신호를 알아차린 어미 닭이 바깥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노력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듯 말이다. 회사, 지인, 친지, 가족의 무사안녕까지 빌고 단을 내려오니 마음이 구름 위를 나는 듯 가볍다.

하산 길은 겨울 태백산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아침 햇살에 인간이 그린 어떤 회화보다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순백으로 뒤덮인 백두대간의 능선들을 굽어보며 상서로운 기운을 맘껏 들이마시는데, 폐부 깊숙이 와 닿는 청량감에 가슴이 시릴 정도다. 신령스러움을 더하는 주목 군락지는 또 어떤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들이 눈 속 깊이 발을 묻고 수빙(樹氷)과 눈꽃을 매단 채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서 있는 모습들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겨울 태백산은 순백의 눈과, 천지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굽이치는 능선들과, 산호 같은 주목들이 빚어내는 향연으로 눈이 부시다. 이곳을 일러 왜 태백(太白)이라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직 식지 않은 태백의 신성한 정기를 보내드리니 듬뿍 받으시길.

오영호 < KOTRA 사장 youngho5@kotr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