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책사

입력 2014-01-06 20:29
수정 2014-01-07 03:49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나라 유방을 도운 장량은 뛰어난 책사(策士)였으나 몸이 약해서 전투에 참가한 적은 없다. 대신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작은 꾀를 내어 유방을 도왔다. 유방이 서촉으로 들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 중원으로 돌아올 뜻이 없다는 제스처를 보인 것, 그곳에서 거병하며 항우가 초회왕을 살해하고 옛 왕국들의 후예를 푸대접한 점을 명분으로 세운 것도 그의 전략 덕분이었다.

나중에 유방이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재주가 탁월하다”며 장량에게 3만호의 식읍을 상으로 내렸지만 그는 이를 사양했다. 건국공신인 그가 이후의 위기를 예견했던 것일까. 나라를 세운 뒤에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덕에 한고조가 공신들을 무참하게 다 죽이는 과정에서도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반면 유비의 책사 제갈량은 군사권까지 휘두른 막강권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천하통일에는 실패하고 패전을 거듭한 끝에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전쟁의 책략은 갖고 있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덕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책사란 그냥 계책과 모략만 꾀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면서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의 하륜도 비교되는 인물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격동기에 새 왕조를 설계한 핵심인물이지만, 과욕 탓에 정적의 칼을 맞고 말았다. 이와 달리 하륜은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다지면서도 스스로 욕심을 줄여 비극을 면했다.

책사의 역할은 주군과 조직의 운명을 가르고, 자신의 목숨까지 좌우한다. 최고권력자를 도와 중대사를 꾸미고 집행하다 보면 권력이 집중되고, 그 결과 제 발등을 찍거나 정적들의 제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중종의 개혁 동반자였다가 반역자가 된 조광조도 그렇다.

이번에 안철수의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영입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오랫동안 보수진영의 책사로 많은 꾀를 내온 지략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점과 이리저리 둥지를 옮겨다닌 ‘철새 이력’ 때문에 말이 많다. ‘새(鳥)정치’라는 비아냥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하긴 ‘천하를 경영하려면 유능한 책사를 얻으라’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유능한 책사는 어리석은 지도자를 섬기지 않는다’고도 했다. 까딱하면 ‘새 정치’는 없고 ‘헌 정치’ 논란만 커질 판이다. 뛰어난 책사와 ‘영혼 없는 정치기술자’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