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입력 2014-01-03 20:31
수정 2014-01-04 03:51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 백승현 기자 ] 2005년 영국 왕립학회에서 흥미로운 설문조사가 있었다.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 과학사와 인류에 공이 더 큰 사람은?” 결과는 뉴턴의 압승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비행기가 뜨는 이치를 설명한 베르누이 양력 이론도, 음파·파동이론도 모두 뉴턴의 이론적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뉴턴은 371년 전 오늘(1643년 1월4일) 영국 링컨셔주의 작은 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린 뉴턴은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1661년 케임브리지대에 근로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할 즈음 영국을 덮친 흑사병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낙향했다. 1666~1667년 고향에서의 2년은 뉴턴의 천재적인 두뇌가 폭발한 시기였다. 사과나무 아래서 중력의 영감을 얻었고, 미적분 계산법을 발견했으며, 프리즘을 통해 빛은 흰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숱한 발명과 발견에도 책을 내지 않았던 뉴턴은 1687년 40대 중반이 돼서야 연구를 집대성한 세 권의 책을 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약칭 ‘프린키피아’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만유인력’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후 정계에도 진출해 국회의원이 됐고, 왕립학회장도 지냈다. 말년에는 왕립 조폐국 장관을 맡아 위폐 방지를 위한 동전 테두리의 톱니무늬도 고안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727년 어느 봄날, 8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 아이작 뉴턴

-1643년 영국 링컨셔주 출생
-1661년 케임브리지대 입학
-1672년 왕립학회 회원 선출
-1687년 프린키피아 출간
-1689년 국회의원 당선
-1727년 84세로 타계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