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사 여행] "번영 누리려면 기존제도 보존해야…복지는 부자의 의무"

입력 2014-01-03 17:16
(48) 보수주의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


‘바꿔, 바꿔, 모두 바꿔!’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래된 관습, 전통 생활방식, 법률, 헌법 등 기존의 모든 사회제도를 갈아치우고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사회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는 게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의 이념이었다. 유럽 대륙은 물론 영국 지식인들도 그제야 인류가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 번영을 기약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부푼 기대로 혁명 대열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혁명은 공포와 독재의 길이라고 경고하면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싶으면 대대로 내려온 전통 상관습, 도덕적 잣대, 생활방식, 법 등 일상적인 경제적 삶을 안내하는 기존의 복잡한 사회제도를 소중히 여기고 무리한 개혁은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영국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다.

아버지가 권유하던 법률가의 길을 접고 정치철학에 심취해 타고난 문필가적 재능으로 저술활동을 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버크가 평생을 바친 건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전통, 관습, 관행 등을 보수(保守)해야 할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를 ‘보수주의 원조’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 사회제도의 대부분은 정부가 계획해 만든 게 아니라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됐다는 게 버크의 설명이다. 영국의 불문법도 대헌장, 권리장전, 법원 판결, 삶의 가치 등 유서 깊은 역사와 진화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수세대를 거치면서 조상들이 획득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 전통, 관습, 생활방식 등 전래된 사회제도를 숭배해야 한다는 그 보수주의자의 주장도 흥미롭다. 그런 제도가 인간들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그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와 진화에서 얻은 제도는 수많은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하기에 선험적 이성에 의해 만든 제도보다 탁월하다는 버크의 주장은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는 혁신적 변화와 경제 개혁을 싫어했는데 그런 변혁은 기존 질서의 파괴만을 초래할 뿐 전혀 실익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역사현실을 선험적 이상향에 맞추려고 한다. 이런 합리주의는 인간 지성의 파괴적 운동인데 그 전형적 예가 프랑스혁명이라는 게 버크의 해석이다.

그래서 버크는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미국의 독립혁명, 영국의 명예혁명과는 달리 프랑스혁명은 폭정과 혼란, 경제의 파괴를 부른다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현실로 드러났다. 프랑스혁명은 교회재산 몰수, 지폐 강제 통용, 가격과 임금통제, 재분배 등 전체주의 통치로 이어졌다. 상업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고상한 매너와 제도를 파괴해 유럽에서 가장 앞서가던 프랑스 경제를 영국과 독일경제에 뒤처지게 만든 게 프랑스혁명이었다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게 아니라 우열(優劣)이 있다는 버크의 인식도 흥미롭다. 신분상 서열과 경제적 불평등은 자연스럽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이게 귀족주의를 정당화하는 그의 논리다.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나 도덕적 품성이 높은 사람이 사회의 서열구조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실력주의도 그 보수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서열을 중시하는 엘리트주의가 보수주의의 핵심 개념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선택받은 계층은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보수주의 개념이라는 걸 주지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경제성장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버크의 주장은 친시장적이다. 정부가 시장에 등장하면 그 순간부터 시장 원칙은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임금과 상품 가격은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게 버크의 믿음이다. 매점매석, 독점행위를 막기 위한 입법도 결국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흉년으로 인해 식량 가격이 폭등, 농촌에서 소요가 발생하리라는 우려에서 가격을 낮추려는 정부 정책도 강력히 반대했다. 인플레이션 정책은 주민을 도박꾼으로 만들고, 그 피해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서민층 몫이라는 이유에서 그런 정책을 반대한 것도 버크의 친시장적 관점이다. 그러나 토지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고 그래서 이익을 위해 사고팔거나 미래 수익을 위해 투자할 대상이 아니라는 버크의 주장은 보수주의 토지사상이다.

보수주의 원조인 버크는 정부의 복지 분배를 반대했다. 스스로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위축시키고 복지를 위한 조세 부담은 모든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정부가 복지 기능을 담당하기 시작하면 영국은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이끈 자코뱅주의의 폭정에 빠진다고 우려했다. 복지 부문이야말로 귀족, 부자의 온정주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버크는 보수주의 사상을 개발해 이성을 남용하는 개혁 만능주의를 억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수호하는 데 탁월한 기여를 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버크 사상의 힘 사회주의 개혁 반대하는 강력한 대응논리 역할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 이념과 애덤 스미스 전통의 자유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흥미롭다. 인간은 사회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도덕적 인간이 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관, 도덕적 인간들이 습득한 도덕이 제도화되는 과정이 곧 역사적 과정이라는 생각에는 이 두 이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버크의 보수주의는 전통 관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과거 회고적 성격이 강한 반면 자유주의는 미래 전망적이다. 자유주의는 기존의 사회제도를 고수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동하도록 허용한다. 자유주의는 변화를 방해하는 정책, 법적 요인들을 제거한다. 보수주의는 인간을 우열로 구분하지만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똑같이 지식의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여기고, 그래서 엘리트주의도 반대한다.

2세기 동안 전개된 보수주의는 버크가 제시한 논지에서 출발할 정도로 그의 사상적 영향은 매우 크다. 그 힘이 얼마나 큰가는 그의 유명한 저서《프랑스 혁명의 성찰》이 보수주의의 텍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사실이 입증한다.

버크사상은 보수주의 논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보수주의가 전개돼 왔다. 버크는 복지를 귀족, 부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맡겼지만 영국의 디스렐리, 독일의 비스마르크 등 19세기 보수주의 정치인들은 정부의 힘을 빌려 약자와 빈민을 보호했다.

20세기 보수주의는 영국의 간섭주의를 의미하는 케인스주의에 영합해 관리 또는 온정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이념이 되는 등 보수주의는 필요할 때마다 이념적 내용을 바꾸어 실용주의로 변동됐다.

그러나 버크의 보수주의가 강력한 대응논리로 역할한 것은 냉전시대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라는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 세력으로 보고 이 체제를 수호하려고 했다. 보수주의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개혁을 반대하는 논리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