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바야시 가쓰히코 하드록공업 사장 "아이디어로 사람을 행복하게"…조립모형에 빠진 꼬마 발명가

입력 2013-12-27 06:58
절대로 풀리지 않는 너트로 37년 연속흑자 '대박행진'

첫 작품은 씨 뿌리는 기계
바퀴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 내 자동으로 씨앗 나오게 설계

해결책은 가까운 곳에 있다
문에 박혀져 있는 쐐기 보고 풀리지 않는 너트 힌트 얻어

한우물을 파고 또 파라
고객 요구 없어도 개선 또 개선…유럽·호주로 수출지역 확대


[ 강영연 기자 ]
2005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미국기계학회 콘퍼런스에서는 독특한 연구 결과가 소개됐다. 일본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는 너트(암나사)가 절대 풀리지 않는 구조를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발표자인 사와 도시유키 일본 마나시대 교수는 “아무리 격렬한 진동과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이 너트는 구조적으로 역회전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 너트는 하드록공업의 설립자 와카바야시 가쓰히코 사장이 1973년 개발한 제품이다. 와카바야시 사장은 이 너트의 성장성을 믿고 이듬해인 1974년 창업을 결심했다. 이 회사는 창업 이후 올해까지 39년간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2007년 뉴스위크는 하드록공업을 ‘세계가 주목하는 100대 일본 기업’으로 선정했다.

○꼬마 발명가, 사장이 되다

와카바야시는 1933년 오사카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경영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니어처와 조립모형을 좋아했던 그는 열 살 때 처음 발명품을 만들었다. 당시 그는 태평양 전쟁을 피해 아버지의 고향인 나가노현 인근 시골에서 피난 중이었다. 어린 와카바야시는 농사를 짓는 어른들을 지켜보며 허리를 굽혀 일일이 씨를 뿌리는 작업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좀 더 편하게 씨를 뿌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바퀴에 동일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자동적으로 씨가 나오게 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대학생이던 1953년에는 사용하기 편리한 잉크병을 만들어 ‘대박’을 쳤다. 당시 만년필에 잉크를 넣으려면 잉크병 속에 펜촉을 넣어야 했다. 하지만 잉크병이 깊어 잘못하면 펜촉 전체가 잉크에 젖는 일이 많았다. 그는 잉크병 깊이를 조절해 일정량만 펜촉에 묻힐 수 있는 병을 만들었고, 실용신안에 등록했다. 이 발명품은 30만엔(약 305만5000원)에 문구점 주인에게 팔렸다. 당시 평균 대졸 초임 월급(6000엔)의 50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졸업 후 오사카의 밸브회사에 설계자로 일하면서도 발명에 대한 열정은 잊지 않았다. 1960년의 출장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수많은 공업제품이 전시된 곳에서 풀림방지 너트의 한 종류인 ‘시호스너트’에 매료됐다. 시호스너트는 안에 코일스프링을 장착해 볼트의 나삿니를 눌러 풀림을 방지하는 제품이었다. 가격은 비쌌지만 잘 팔렸다. 그는 시호스 너트보다 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하고 코일스프링보다 저렴한 판스프링을 이용한 ‘유니언너트’를 개발했다. 1961년 밸브회사를 그만두고 유니언너트를 판매하는 후지산업사를 세웠다.

○끝없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다

유니언너트는 당시 공장 자동화, 기계화 바람을 타고 컨베이어 제품을 안전하게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제품으로 크게 성공했다. 와카바야시와 그의 동생인 시카, 친구까지 모두 3명이 시작한 회사는 3년 만에 직원이 30명으로 늘어났다. 1973년에는 직원 80명, 월매출 1억3000만엔의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잘나가던 사업에 문제가 발생했다. 풀리지 않는 제품이라고 광고했던 유니언너트가 격렬한 진동에 견디지 못하고 풀리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전체 판매량에 비해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와카바야시 사장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절대로 풀리지 않는 너트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한번 연구에 들어갔다.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수많은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계속되는 진동에 모두 풀렸다. 그는 “절대 안 풀리는 너트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해결책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기분 전환 겸 집 근처에 있는 신사(神社)를 찾은 와카바야시 사장은 신사 앞에 놓인 문에 쐐기가 박힌 것을 봤다. 쐐기 덕에 이음 부분이 단단히 고정돼 있는 것이었다. 그는 볼트와 너트 틈새에 쐐기를 박으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제품 개발에 적용, 절대 풀리지 않는 하드록너트를 개발했다.

하드록너트 개발엔 성공했지만, 제품화를 놓고 당시 공동대표와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공동대표는 고객 불만이 미미한데 굳이 잘나가는 유니언너트를 두고 신제품을 만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팔기 위해 새로운 비용이 들어가는 것도 우려했다. 결국 와카바야시 사장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대신 1974년 하드록공업을 설립, 새로운 제품에 그의 운명을 걸었다.

○너트 하나로 세계시장 제패

하드록공업 설립 초기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일반 너트보다 20~30% 비싸고 쐐기 역할을 하는 부품이 추가돼 무거운 제품에 대한 인기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풀어지지 않는 너트가 필요한 곳이 아니면 판매하기 어려웠다.

첫 판매처는 민간 철도회사였다. 민간 철도회사인 한신(阪神) 전철은 흔들림이 많은 객차와 수많은 기차가 지나가면서 쉽게 나사가 풀리는 레일 연결 부분에 하드록너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7년 일본국철도가 민영화되면서 하드록너트를 도입했다. 1990년대 초반 도호쿠 지방에서 레일 연결용 볼트가 빠져 탈선사고가 발생하면서 동일본여객철도도 전 구간에서 하드록너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대 초엔 송전선용 철탑에도 납품을 시작했다. 통신용 철탑은 높이가 100m 전후로 바람의 영향에 따라 심하게 흔들린다. 그만큼 너트가 느슨해지거나 풀리는 경우가 많다. 철골을 용접으로 연결할 수도 있지만,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것이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에 풀리지 않는 너트가 꼭 필요했다.

풍력발전장치와 고속도로, 원자력발전소, 대형 선박, 초고층 빌딩 등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모양, 크기, 재질, 표면처리 방법 등을 다양화해 수십 가지가 넘는 너트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규격만 다를 뿐 하드록공업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하드록너트 하나다. “중소기업은 사업 다각화보다 한 제품에 집중해야 한다”는 와카바야시 사장의 신념 때문이다. 그는 “하드록너트도 얼핏 보기엔 더 발전할 것이 없어보이지만, 개선할 여지는 많다”며 “다른 기업이 진출한 사업분야가 좋아보인다고 따라가기보다는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와카바야시 사장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같은 수익률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해외시장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1996년 수출 전문가를 스카우트해 팀을 꾸렸고, 2000년에는 무역전담부서를 만들어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기회는 의외의 사건으로 생겼다. 2002년 영국의 BBC는 영국 포터즈바역에서 급행열차 탈선으로 7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BBC는 사고의 원인이 선로의 나사풀림 현상 때문이라면서 하드록너트가 나사풀림 방지 효과로 명성이 높다고 전했다. 방송을 계기로 시작된 하드록너트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하드록공업은 매달 2만개 이상의 너트를 영국에 공급하고 있다.

유럽뿐 아니다. 2003년 대만 고속철도, 호주 퀸즐랜드주의 철도 신호시스템 등에 하드록너트가 사용됐으며 2008년 8월에는 중국 베이징과 톈진을 연결하는 고속철도에도 제품을 납품했다. 한국이 자체 개발한 KTX-Ⅱ에도 하드록너트가 쓰이고 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