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어느 초겨울 밤의 아름다운 풍경

입력 2013-12-06 21:25
"춥고 허기졌던 우리네 대학 시절
고봉밥과 외상술로 달래주던 분들
아, 다시 못 올 그 시절의 낭만이여"

이승하 <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 >


다들 가난한 문학도였다. 향토장학금으로는 술 한 잔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그런데 술을 꼭 마시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다. 서정주 선생님의 시 창작실기 시간이나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 창작실기 시간에 호된 꾸지람을 들은 날(거의 매주 듣지만), 오랜만에 약간의 칭찬을 들은 날, 그날은 맨 정신으로 귀가할 수 없었다. 술을 퍼마시고 뻗어버리고 싶었지만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학생들은 ‘개미집’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서울 흑석동에 술집 문을 연 아주머니는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집안 사정과 호주머니 사정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오늘 술을 반드시 마시고 귀가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다음에 갚아. 떼먹기 없기다.” “네, 아줌마. 이자 쳐서 갚을게요.” “이자 줄 돈으로 원고지나 사.”

1년에 몇 번 개미집의 김치 두부 계란말이 안주가 동이 날 때가 있었다. 졸업한 선배가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 봉투를 품에 넣고 나타나면 재학생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개미집에 몰려들었다. 대전 출신 성백술 학생은 술을 마시다 탁자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곤 했고, 한여름이 아니면 김진자 아주머니는 안방에서 이불을 꺼내와 덮어주곤 했다.

경기 안성 땅 내리의 황량한 들판에 대학 건물이 세워졌다. 1985년에 문을 연 카페 ‘동인’의 주인을 학생들은 고모라고 불렀다. 마침 두 조카가 문예창작학과 학생이 되자 동인은 치기만만한 문학도들의 아지트가 됐다. 카레와 돈가스는 양이 많아 배고픈 남학생들은 고모의 인심에 감동하곤 했다. ‘동인고모’ 이해선 씨는 여행작가였다. 방학이면 훌쩍 어디론가 떠났고, 몇 년 만에 책을 한 권씩 냈다. 인세는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인 외상술(이 술은 공술이 되곤 했다)이 됐다. 소설가 전성태는 훗날 자신이 받은 인세로 동인고모에게 밥이나 술을 산 적이 없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고모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자였고 학생들은 평생 받거나 얻어먹는 수혜자였다. 세월이 흘렀다. 김진자 여사는 20년 한 술집의 문을 닫았고 동인고모는 20년 한 카페의 문을 닫았다. 학생들은 둥지를 잃고 흩어져서 옛날 얘기를 하며 두 사람을 그리워했다.

학과 창립 60주년을 맞이해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두 사람에게 기념패를 드리기로 했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외상술을 준 분에게, 허기진 유학생들에게 따뜻한 밥을 고봉으로 준 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귀하는 중앙대 예술대학이 소재한 흑석동에서 ‘개미집’을 운영하면서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 많은 추억과 낭만을 심어주었으므로 창과 60주년을 맞아 명예동문으로 추대하여 기념패를 드립니다.” 강당을 꽉 메운 400명 동문은 우레 같은 박수를 쳤고, 70대 중반의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념패를 받았다. 밀린 외상값을 대신하여 네 돈짜리 금반지가 기념패와 함께 수여됐다. 중년의 성백술 씨는 단상에서 할머니를 포옹했다.

여행작가 동인고모에게는 기념패와 50만원짜리 몽블랑 만년필이 전달됐다. 소설가 전성태가 단상에 올라와 이해선 씨와 포옹을 했다. 아니, 동인고모는 춥고 배고파하는 대학생을 꼭 껴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어머니요 누나 같은 존재였다. 학생들은 두 분한테서 술과 밥을 사먹으며 훈훈한 정을 느꼈고,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랬다. 많은 졸업생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던 것은, 이제 이런 낭만이 대학가에서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최백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라고.

이승하 <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