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구월산 유격대

입력 2013-12-01 21:00
수정 2013-12-02 05:35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 고두현 기자 ] 황해도 구월산은 북한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음력 9월 경치가 가장 좋다고 해서 구월산으로 불린다. 수려한 산세에 봉우리만 909개에 이른다. 이렇듯 풍광 좋은 명산에도 숱한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일제치하에서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던 대한독립단원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고, 6·25 때는 수천명의 반공유격대가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피를 흘렸다.

1998년 처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구월산 유격대는 1950년 말 김종벽 대위가 창설한 연풍부대를 모체로 출발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대원을 잃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만든 부대였다. 처음엔 600여명 정도였으나 이듬해 초 2500명으로 늘었고 휴전 직후 해체 때까지 800여명 규모를 유지했다.

이들이 올린 전과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휴전선 이북의 30여개 섬을 장악해 인민군과 중공군 몇 개 사단을 묶어두고 30여만명의 동포들을 탈출시킨 공은 더욱 크다. 수십명의 여성대원도 있었다. 이들은 빨래를 너는 방법으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대원들의 생필품을 조달하면서 전투를 도왔다.

그중 가장 돋보인 여성은 이정숙 대장이었다. 부모와 남편이 반동분자로 몰려 옥사하자 무장대를 조직한 그녀는 밤새 100리를 걸어 89명을 구출하는 등 ‘구월산 여장군’ 별명에 맞는 전공으로 육군 총참모장 표창까지 받았다. 그녀와 김종벽 대위의 활약은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만화 ‘구월산 유격대’에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구월산이 유격대의 거점이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북한이 공산화하자 200여만명이 남으로 피란했으나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장항쟁에 나선 게 첫 번째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항거가 거셌다. 인민군 징집을 거부하고 구월산에 모인 가톨릭 신자들은 전쟁 전날 밤 주임신부가 납치되자 격분해 유격대에 합류했다. 인근에서 태어난 안중근·김구(해주), 이승만(평산) 등 애국지사들의 영향까지 겹쳐 이들의 정신무장은 남달랐다.

그저께 북한이 억류 중인 6·25참전 미국인 메릴 에드워드 뉴먼(85)의 ‘사죄문’을 공개하면서 구월산 유격대의 활약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가 전쟁 당시 구월부대 고문관으로서 적대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죄문 운운은 고령의 관광객 억류에 부담을 느껴 석방 절차를 밟기 위한 제스처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구월산 유격대의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