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국은 왜 북한보다 잘 사나…자본축적의 차이

입력 2013-11-29 16:41
자본시장 60년



미국은 왜 러시아보다 잘 살까. 우리나라는 왜 북한보다 잘 살까. 지구상에선 어떤 나라는 ‘더 싸고 더 좋은’ 상품과 여가를 즐기며 살고, 어떤 나라는 빈곤 속에서 허덕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자본축적과 1인당 자본재 투입량의 차이(결과적으로 생산성의 차이) 때문이다.’

모든 경제에서 최종생산은 학교에서 배운 ‘생산의 3요소(토지, 노동, 자본)’ 결합으로 이뤄진다. 경제학자들은 미국이나 러시아, 한국이나 북한은 토지와 노동면에선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노동의 숙련도 측면에서 차이가 있으나,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전제한다.

#로빈슨 크루소와 막대기

그렇다면 ‘자본축적과 1인당 자본재 투입량의 차이’는 무슨 의미일까. 경제학자들은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 크루소를 자주 예로 든다. 로빈슨은 무인도에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오로지 과일 따기와 시간 보내기(여가)뿐이다. 그는 시간당 20개의 과일을 딸 수 있음을 안다고 하자. 이를 토대로 그는 하루 중 10시간(200개)을 과일 따기에, 14시간을 여가에 쓴다고 가정하자.

로빈슨이 어느 날 잘 깎은 막대기(이것을 자본재인 설비나 기계로 간주해도 된다)를 투입했다고 해보자. 막대기 덕분에 시간당 딸 수 있는 과일량을 50개로 늘릴 수 있다. 로빈슨은 이전의 과일생산량 200개보다 300개나 더 많은 500개를 딸 수 있게 된다. 막대기를 만드는데 y만큼의 시간이 든다면 로빈슨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 24시간은 고정돼 있기 때문에 로빈슨은 선택해야 한다. 로빈슨은 시간 단위당 더 많은 만족을 얻기 위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비교해 볼 것이다.

로빈슨이 10시간을 들여 막대기를 만들기로 했다면, 10시간 동안 그는 소비(과일따서 먹기)를 제한하고, 유용성이 나중에 나타날 막대기라는 자본재 생산으로 노동을 이전하는 셈이 된다. 경제학에선 로빈슨의 소비제한을 ‘저축’이라고 하고, 자본재 생산으로 노동과 토지를 이전하는 것을 ‘투자’라고 말한다. 막대기라는 자본재를 투입한 결과, 생산성이 더 높다면 이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과일을 따고, 여가시간도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당 10켤레와 100켤레

만일 그것이 단순히 과일따기가 아니고 모든 산업부문에 걸쳐 발생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막대기를 만들기보다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머레이 라스바드 등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래서 미국과 한국이 잘 산다”고 답한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노동량을 투입하고도 북한은 1시간당 신발 10켤레를, 한국은 100켤레를 만든다면 승부는 끝난다. 북한은 신발을 만드는 기계설비, 기술, 신발재료(즉 막대기)를 제대로 확보하지도 못한 결과다. 반면 한국은 최신 기계 등을 투입해 질좋고 값싼 신발을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이런 차이는 결국 더 싸고 더 좋은 재화의 대량생산과 국부창출로 나타난다. 한국에선 첨단 자본재가 투입돼 더 싸고 더 좋은 제품이 나온다. 선순환이다. 국제무역 경쟁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경쟁력이 강해진 것은 자본축적을 통해 자본재 투입을 잘한 데 대한 보상이다. 물론 자본축적이 가능해지도록 한 시장경제, 사유재산제, 법치, 경제적 자유, 경쟁, 혁신과 같은 제도적 기반도 중요한 요소다.

#폐허에서 핀 한국 자본시장

20세기 최고의 로빈슨 크루소인 대한민국은 6·25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자본을 축적하고 자본재 투입량을 늘린 기적을 행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역시 전쟁 직후엔 북한과 에디오피아보다 못 살았다. 생산성을 높일 자본은커녕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이렇다할 기업도 없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는 정말 우연히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됐고, 그 제도하에서 이전 시대에선 상상도 못했던 생산성의 폭발을 경험했다. 그 시작이 바로 자본시장 육성이었다. 기업이 필요한 화폐자본이 시급했다. 1953년 증권업협회와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현재의 한국거래소)가 설립됐다. 장롱 속에 있는 돈을 꺼내(저축) 기업하는 사람들이 쓰게 하자는 취지였다.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계획 덕에 1970년대 들어 은행 같은 간접금융시장과 주식시장 같은 직접금융시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채시장의 돈들이 은행저축과 주식, 증권시장으로 몰렸다. 이 자금은 기업으로 흘러들어가 기계설비 등 자본재 구입에 쓰였다.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외국에서 자본을 들여왔고, 대일(일본) 청구배상금, 베트남전 참전 대가 등으로 화폐자본과 실물자본(기계 설비, 재료 등)을 축적했다. 주식시장도 외국인 투자에 개방, 해외자본이 들어왔다. 반면 저축할 돈이 없는 북한은 자본축적과는 거리가 먼 반(反)자유시장경제의 길을 걸어왔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1956년 증권거래소 설립…세계 10위권 '성장'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1953년 대한증권업협회와 1956년 증권거래소(현재의 한국거래소)가 설립되면서 태동했다. 6·25전쟁 뒤였고, 기업다운 기업이 없어 자본조달력은 미미했다. 주식거래도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1년부터 본격화됐다.

1972년 이른바 ‘8·3 사채동결’ 조치는 기업과 주식시장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기업들은 사채시장에서 고금리로 돈을 빌려 쓰고 있었다. 높은 이자탓에 기업들은 허덕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모든 기업의 사채를 당국에 신고토록 했다. 동시에 사채를 기업에 투자해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사채업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자금출처도 묻지 않기로 숨통을 터줬다. 그러자 기업이 많이 생겼고 기업을 공개해 자본을 조달해가는 시장 규모도 커졌다. 1970년 전후 주식거래대금은 400억원에 불과했으나 1976년 6653억원으로 증가했다.

1979년 서울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했다. 주식거래 전산화가 이뤄졌다. 경제가 호황기를 타면서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몰렸다. 1989년 ‘주가지수 1000 시대’, 2008년 ‘2000시대’가 잇따라 열렸다.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확대됐고, 주식양도 차익에 대해 비과세도 도입됐다. 외국자금이 물밀듯 들어와 2003년 증권시장의 외국인 투자비중이 40%를 넘어섰다. 지난 10월 현재 한국거래소 시가총액은 1193조원 규모로 세계 10위권대 시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