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존엄의 계절

입력 2013-11-27 21:23
수정 2013-11-28 05:04
그때는 왜 그렇게 날을 세웠던 걸까
12월은 한해 돌아보는 '존엄의 계절'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 >


11월의 끝자락에서 올 한 해가 다 갔노라고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바로 눈앞에 ‘존엄의 계절’이 아닌가. 가지마다 높고 푸르게 나부끼던 잎사귀들은 다 내려와서 땅위에 나지막이 엎드렸다. 한 해 동안 지켜왔던 자신의 모습을 해체하고 땅 밑으로 녹아들고 있다. 자연의 엄정한 섭리다. 그간 사람들과 함께 무슨 일을 해왔는지,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갖는 그 자세를 내게 비추어 볼 일이다.

‘새문서’를 클릭하고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나가 보니, 뜻밖에도 그들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함께 했던 일들, 나누었던 얘기들도 예전과 다르게 생각되는 것은 웬일인가. 서로 민감하게 대립했던 사안들, 내가 옳았다고 고집했던 일들도 지금 와서 보니 그렇게 날을 세워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라는 우주의 위대한 섭리가 사소한 만남을 통해서도 서로 무엇인가를 나누게 했고, 소중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혹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던 유학시절의 미국 학생이 생각난다. 사귀고 있는 친구 속에서 신(神)의 현존을 느끼고, 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신의 숨결을 느꼈다고 얘기해주던 그 학생에게서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생각하게 된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인간은 이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어린왕자는 탄식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를 가나 모래사막이고, 외롭게 버려지고, 누구를 만나도 이해관계만 따지고 드는 거친 곳이라고 생각되는가.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줄기가 베풀고 있는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리는가. 내게 왔다가 실망하고 간 사람이 내가 적어보는 이름들 속에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가오는 12월은 거친 세상을 우리 가슴에 담고 보듬어보는 ‘존엄의 계절’이다.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