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호 기자 ]
“국내 최초의 할인점 이마트. 신세계가 새로운 형태의 점포를 선보입니다.”
1993년 11월12일 이마트 창동점이 개업할 당시 광고 전단에 들어 있던 문장이다. 이마트를 비롯해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는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웬만한 가정은 채소 생선 고기 등 대부분의 먹거리를 대형마트에서 구입한다. 옷과 가전제품도 대형마트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대형마트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20년 전 이맘때 문을 연 이마트 창동점이 국내 최초의 대형마트였다.
#가격 경쟁력 무기로 성공
20년 전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는 곳은 백화점, 전통시장, 대리점 등 크게 세 군데였다. 옷은 백화점에서, 식품은 전통시장에서, 가전제품은 대리점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형마트라는 새로운 유통 형태가 처음 등장했을 때 유통업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백화점, 전통시장, 대리점 등이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대형마트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쌌기 때문이다. 초기 대형마트는 매장 내 인테리어를 간소하게 했고 마케팅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도 백화점에 비해 적었다. 그만큼 운영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운영 비용을 줄인 만큼 상품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물건값이 싸다는 것이 입소문을 통해 퍼져나갔다. 이마트 창동점 점장이었던 정오묵 씨(현 청우식품 대표이사)는 “주부들이 매장 안 공중전화에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 ‘여기 물건이 정말 싸다’며 한 번 와 보라고 말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기에는 농심 등 대형 식품 기업들이 이마트에 납품을 하지 않았다. 대형마트에서 싼 값에 팔면 일반 슈퍼마켓 등 다른 곳에서 파는 가격도 낮춰야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마트에 납품한 경쟁사의 매출이 급증하자 대형 식품 기업도 대형마트 납품을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현재 대형마트는 백화점을 제치고 최대 유통 채널로 부상했다. 전국에 470여개 대형마트 점포가 있고 6만9000명이 대형마트 본사와 각 점포에 근무하고 있다.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대형마트 매출은 33조7433억원으로 백화점(21조1256억원)보다 많았다.
#유통단계 단순화 등 혁신 주도
대형마트는 유통 단계를 줄여 상품 가격을 낮추는 등 유통산업의 혁신을 주도했다. 복잡한 유통 구조는 국내 유통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생산지에서 가격이 쌌던 물건도 도매상, 중간 도매상, 소매상 등 여러 단계를 거치는 바람에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는 비싸지는 것이다. 대형마트는 채소 생선 등을 산지에서 매입해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매장에서 판매한다. 유통 단계가 줄어든 만큼 가격을 낮출 여지가 생긴다.
자체 브랜드(PB) 상품도 대형마트가 처음 선보였다. PB 상품이란 농심 롯데제과 등 제조사가 아닌 이마트 홈플러스 등 유통업체의 상표를 달고 나온 상품을 말한다. PB 상품은 유통업체가 처음부터 자사 매장에서 팔기로 결정하고 제조업체와 협력해 만드는 상품이기 때문에 제조업체가 별도의 마케팅이나 판촉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제조업체의 비용이 그만큼 줄어들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다.
소비 문화도 바뀌었다. 과거에 ‘장보기’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에서는 남편이 어린 자녀를 태운 쇼핑카트를 끌고 다니고 그 옆에서 아내가 물건을 골라 담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밝고 깨끗한 매장에 다양한 상품을 종류별로 찾기 쉽게 정리해 가족 나들이를 겸해 쇼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덕분이다. 대형마트가 매장 내에 식당을 운영하고 어린이와 주부를 위한 문화강좌를 개설한 것도 가족단위 쇼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전통시장 붕괴 '그림자'
유통산업 혁신이 대형마트의 빛이라면 전통시장 붕괴는 대형마트가 남긴 그림자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주변 전통시장과 중소 상인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시장경영진흥원에 따르면 전통시장 수는 2004년 1702개에서 지난해 1347개로 줄었다. 대형마트는 점포를 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통시장과 중소 상인의 반발에 부딪쳤다. 홈플러스 합정점은 주변 중소 상인과 1년 이상 갈등을 빚다 예정보다 7개월 늦은 지난 3월 개점했다. 이마트는 경남 김해와 경기 과천, 홈플러스는 서울 상봉동에서 출점을 놓고 주변 상인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급기야 국회는 ‘골목 상권’을 보호한다며 대형마트를 규제하는 법을 마련했다. 대형마트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월 2회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의무적으로 문을 닫아야 하고 밤 12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는 영업을 할 수 없다. 신규 출점도 까다로워졌다.
영업규제에 소비 침체가 겹치면서 올 들어 대형마트 매출은 감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집계한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 매출은 올 들어 2월과 6월을 빼고는 매달 전년 동월보다 감소했다.
대형마트 규제하면 전통시장 살까?
국회가 대형마트 영업을 규제하는 법을 만든 것은 대형마트가 한 달에 두 번이라도 문을 닫으면 주변 전통시장과 중소 상인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가 문을 닫는 날에는 전통시장과 동네 중소형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살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대형마트 영업 규제가 1년 넘게 시행된 지금 전통시장이 과연 반사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연세대 경제학부 정진욱 교수와 최윤정 교수는 지난 2월 발표한 ‘대형소매점 영업제한의 경제적 효과’ 논문에서 영업규제 시행 이후 대형마트 매출은 월평균 2307억원 줄어든 반면 전통시장과 소형 슈퍼마켓 매출은 월평균 448억~515억원 늘었다고 분석했다. 대형마트에서 줄어든 소비금액의 20%가량만 전통시장과 소형 슈퍼마켓으로 옮겨간 것이다.
서울시 정책 연구기관인 서울연구원이 지난해 강동·송파 지역 전통시장 상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절반이 넘는 55.2%의 상인이 대형마트 영업규제 이후에도 매출에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영업규제로 대형마트에 상품을 공급하는 농어민과 중소기업 매출이 줄고 소비자가 불편을 겪는 등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형마트는 법률상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하게 돼 있는 의무휴업을 평일에 하는 대신 기금을 조성해 전통시장을 지원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매출이 적은 평일에 의무휴업을 하면 영업규제로 대형마트가 입는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손실이 줄어든 만큼 전통시장을 돕겠다는 것이다. 경기 고양시와 파주시, 제주 서귀포시 등은 지방자치단체 조례를 통해 대형마트가 평일에 휴업하도록 하고 있다.
유승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