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걷기 예찬

입력 2013-11-08 21:34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걷기 예찬은 근세 유럽 지식인들의 특권이었다. 칸트나 루소 괴테는 물론 윌리엄 워즈워스나 키에르케고르 등 이름깨나 날린 작가와 사상가들은 모두 걷고 산책하는 것을 현란한 어구로 찬양했다. 니체는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고 다비드 르 브르통도 걷기를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의 초대”라고 표현했다. 조세 거부 운동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다음과 같은 ‘걷는 자에 대한 예찬’은 더욱 빛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걷기에 필요한 여가와 자유와 독립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걷는 자가 되려면 신의 은총이 필요하고 하늘의 섭리가 필요하다. 걷는 자가 되려면 걷는 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나야 한다.”

풍자가 맥스 비어봄(1872~1956)은 걷기가 “마음만은 귀족이고 고귀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걷기가 물질 아닌 마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각종 ‘길’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요즘 이 귀족의 특권을 오히려 포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질병관리본부 조사에 따르면 1주일에 30분씩 5일 이상 걷기를 실천한 비율이 2008년 50.6%에서 꾸준히 하락해 지난해엔 40.8%까지 떨어졌다.

입동이 지나면서 거리마다 소슬한 바람결에 낙엽이 흩어져 날리고 있다. 가을길이 주는 색감의 변화는 여름철 뜨거웠던 머리를 식혀준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은 고뇌와 분노 질투 등 온갖 감정의 찌꺼기를 가라앉힌다. 여름이나 겨울과는 달리 가을은 사색과 더불어 걷기의 계절이다.

숲길도 좋고 가로수 거리도 좋다. 하루에 30분 이상 걸어보자. 걷다보면 머리 속이 맑아지고 텅 빈 기분이 든다. 밤에 걷는 것도 또한 매력이다. 특히 시골 길은 달과 별 그리고 멀리서 아련히 비치는 불빛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가을이 주는 진정한 행복이다.

지자체들도 근교의 산과 들에 산책길과 둘레길을 만드는 등 길 단장에 한창이다. 서울시 역시 시간과 지역에 맞게 걸을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걷고 싶은 서울길’ 홈페이지(gil.seoul.go.kr)를 새롭게 단장해 지난달 28일 문을 열었다. 서울 둘레길과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양지천길 등 서울시내 크고 작은 길 140개 노선의 정보가 상세히 담겨 있다. 서울 근교 둘레길을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펼쳐진다고 한다. 이 가을에 제대로 한번 걷기조차 못 한다면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