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문화가 국가 흥망성쇠 좌우
규제천국서 번영은 기적 바라는 것
창조경제도 친기업환경에서 가능
안재욱 경희대 서울부총장·경제학 jwan@khu.ac.kr
‘루트128(Route 128)’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외곽지역을 지나는 국도 이름이다. 보통 보스턴 지역에 있는 첨단산업단지를 일컫는다. 이곳은 서부의 실리콘밸리와 자주 비교된다.
루트128과 실리콘밸리는 비슷한 점이 많다. 1970년대에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라는 대도시를 기반으로 형성됐고, 주변엔 세계적인 명문대학들과 많은 우수 연구인력이 몰려 있다. 루트128 지역에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UC버클리와 스탠퍼드대 등 유수 연구교육기관들이 있다.
이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루트128은 실리콘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사실 1970년대에는 루트128이 실리콘밸리보다 규모도 컸고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는 계속 성장하며 번영한 반면 루트128은 정체되고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이런 결과에 대한 원인은 미국 동부와 서부의 문화적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지역문화는 개방적인 반면 보스턴의 지역문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이 있다. 보스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는 근로자의 자유로운 직업 이동을 막고 기업 간 정보흐름을 차단해 신규 기업의 창출과 성공을 어렵게 했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개방적인 문화는 근로자의 자유로운 직업 이동을 허용하고 기업가의 창업정신을 고취시켰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화적 차이가 제도적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다른 주들과 달리 일찍부터 경쟁금지 계약을 불법화해 자유경쟁과 근로자의 자유로운 직업 이동 권리를 강조해왔다. 이런 자유로운 법적·제도적 환경이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었고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어 실리콘밸리를 새로운 정보기술의 창출과 확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경제제도의 차이로 인한 경제성과의 차이는 루트128과 실리콘밸리와 같은 작은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 간에도 나타난다. 미국과 옛 소련, 서유럽과 동유럽, 북미국가와 남미국가들, 대한민국과 북한, 17세기 영국과 스페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동일한 국가라고 해도 어떤 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경제의 번영과 쇠퇴가 나타났다. 사유재산권을 잘 보장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유도하는 시장경제원리에 충실한 제도를 채택한 시기에는 번영했지만 거기에서 멀어진 경우에는 어김없이 쇠퇴했다.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등 거의 모든 국가에서 경험한 바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활성화가 최우선 국정목표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해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일자리가 늘지 않는 이유, 그리고 향후 한국 경제가 심히 우려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경제제도가 갈수록 자유시장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규제를 완화해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어도 모자랄 판에 기업 활동을 억제하고 옥죄는 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순환출자 규제, 일감몰아주기 규제, 하도급법, 통상임금 확대 및 근로시간 단축, 집행임원제 의무화, 감사위원과 이사의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의 상법개정안, 실험실 화학물질을 통제하는 화평법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고 돌로 빵을 만드는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가 성장하며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폭주하고 있는 법안들을 막아야 한다. 더 나아가 기업 활동을 억제하고 있는 규제들을 완화해야 한다. 비정규직보호법을 폐지하고 정규직을 과보호하고 있는 근로기준법을 완화해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유로운 노동시장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서만이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 혁신이 일어나며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다. 정부가 추구하려는 창조경제는 자유로운 경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안재욱 < 경희대 서울부총장·경제학 jwan@khu.ac.k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