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동양 CP사태'의 교훈

입력 2013-10-09 17:49
수정 2013-10-11 08:46
되풀이되는 '좀비 CP'…제발 묶어버린 금융당국
< CP: 기업어음 >

장규호 증권부 차장 danielc@hankyung.com


미국 18대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는 남북전쟁 영웅 중 한 명이다. 북군 총사령관으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대통령까지 당선됐지만 말년은 우울했다. 한 주식중개업체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줬다가 주식사기 공범 신세가 됐다. 작정하고 달려든 금융사기꾼 앞에선 전직 대통령도 별 수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정신없던 2008년 12월엔 500억달러 규모의 초대형 헤지펀드 사기까지 터져 금융시장에 충격을 줬다. 미국 나스닥 회장과 증권거래위원회(SEC) 자문위원까지 지낸 버나드 매도프의 사기극에 미 국민들은 아연실색했다. 빚을 내 빚을 갚는 피라미드식 사기였다. 역사적으로 금융사기는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체념론’은 그래서 뿌리가 깊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선 금융사기가 끊이지 않는다. 저(低)성장, 저소비, 높은 실업률, 고(高)위험, 규제 강화를 특징으로 하는 ‘뉴노멀(new normal) 시대’이다 보니 금융사기의 범람은 불가피하다는 시각도 있다.

5만명 가까운 개인투자자들이 ‘물린’ 동양그룹 사태는 어떤가. ‘사기성 기업어음(CP)’ 발행에 대한 금융당국의 판단이 나오지 않았으니 아직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뉴노멀 시대의 그늘’이라 하기에도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기업금융 제도를 보완하고 철저한 감독 원칙을 지켰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부토건 CP 피해 사건에서 LIG건설 CP, 동양그룹 CP 사건까지…. 죽었다 살아나기를 되풀이하는 좀비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시나리오도 비슷하다. 금융위기로 초토화된 부동산시장이 건설회사 등 그룹의 약한 고리를 부실하게 만든다. 그룹 총수는 구조조정에 나서지만, 헐값 자산매각은 곧 죽어도 싫다. 고비만 넘기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데, 이런 총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법정관리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히고도, 무지한 개인들에게 CP를 떠넘기는 짓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금융감독 당국도 제발을 묶어버렸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올해 ‘기업을 살리는 금융’에 노력하겠다고 했다. 중소기업의 금융 애로를 풀어주고 ‘비올 때 우산을 뺏지 않는’ 감독정책을 펴겠다는 얘기였다. 금감원을 ‘금융장려원’으로 만드는 시도는 좋았다. 나빴다면 타이밍과 동양이라는 대기업 그룹이었다는 점이다. 침몰하는 동양호의 승객을 구조용 보트로 신속히 대피시켜야 할 때에 양수기 펌프를 대주며 ‘물빼라’고 독려한 꼴이 됐다. 위기가 항상 잠복해 있는 뉴노멀 시대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연장선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소비자와 투자자 보호를 더 강조하고 획기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에 반대 행보를 보인 것이다.

후폭풍은 이미 불어닥쳤다. 여의도 정치권에선 증권업 등에 ‘금산분리(산업자본의 금융회사 보유지분 규제)’ 원칙이 적용되지 않아 그룹 총수의 탐욕이 사고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동양증권이 고객보다 계열사 이익을 앞세워 부실 CP와 회사채 판매에 열을 올린 것은 산업자본에 종속됐기 때문이란 논리다. 대기업이 이미 보험, 카드, 증권, 캐피털 등 2금융권 계열사를 갖고 있는 현실에선 불법행위 등이 적발되면 대주주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이러다 ‘기업을 살리는 금융’이 기업을 죽이는 역설을 부르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금융당국의 빠른 상황 판단과 제도 보완이 시급한 이유다.

장규호 증권부 차장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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