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세종대왕은 웃고 계실까

입력 2013-10-04 17:46
수정 2013-10-05 00:49
"세계적 자랑거리인 한글이 있어도
국적불명 조어 남용되는 슬픈 현실
애국애족은 우리말 사랑에서부터"

이승하 소설가·중앙대 교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올해부터 다시 공휴일이 됐다. 잘된 일이다. 아직 여주에 있다는 세종대왕릉에 가보지 못했는데 올해는 꼭 가서 참배를 하리라. 전에는 아이들만 무료관람을 하다가 올해 8월12일부터 만 24세 이하 청소년 전체로 무료관람을 확대했다고 한다. 개인 500원, 단체 400원이니 관람료도 싸다. 가서 세종대왕릉도 보고 북벌에 힘쓴 조선조 17대 왕 효종의 영릉도 보고 오리라. 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종전, 재실, 훈민문, 수복방, 수라간, 비각 등 옛 건물도 있다고 한다.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한다고 해서 모국어에 대한 우리의 애정도 함께 소생할까. 서울시내를 다니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우리말과 영어 복합 단어가 꽤 된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 반포 컬처랜드, 금호 나들목 빌리지 커뮤니티 플라자…, 서울시 홍보책자에 나오는 것으로 비전 서울 핵심 프로젝트, 시민행복 업그레이드, 보육 포털사이트, 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영문자를 섞어서 쓰기도 한다. WDC서울 국제컨퍼런스, SHift, N서울타워, 상도동 SH Vill…. 미국인들은 이런 말의 뜻을 이해할까. 젊은 집현전 학자들을 이끌고서, 원로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철주야 연구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통곡할 일이다.

훈민정음 앞머리에 나오는 한글 창제의 이유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고 있으리라. 이 서문에는 애국과 애민사상이 문맥에 차고 넘친다. 조상이 물려준 문화유산으로 한복, 한옥, 한식, 국악 등이 있지만 우리가 정말 세계만방에 자랑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한글이다.

역대 정권은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영어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학교의 영어집중교육에 만족할 수 없어 영어캠프가 전국 방방곡곡에 생겨났고 영어교육도시가 탄생했다. 조기유학과 어학연수, 교환학생, 워킹홀리데이가 수많은 이 땅의 가장을 기러기아빠가 되게 했다. 그렇게 키운 영어실력이 과연 국력을 신장시켰을까. 영어를 온 국민이 다 자유롭게 구사할 필요는 없거늘,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정권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다른 대학에 다니면서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하려면 영어공부만 해야 한다. 시나 소설 같은 실기과목은 없고 영어시험만 보기 때문인데, 벌써 수십 년 동안 이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문예창작학과도 영어로 강의하는 강좌를 늘리고 있다. 영어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날 정말 심각한 문제는 대학생들의 국어실력 부족이다. 외국에 있다 온 학생이 제법 있고 재학 중 한두 해 해외에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으로 나갔다 오는 학생도 늘고 있다. 영어실력이 느는 것과 반비례해 국어실력이 줄어들어 비문과 오문투성이의 글을 쓴다. 컴퓨터가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웬만큼 바로잡아 주지만 정확하지 않은 문장 구사는 한숨을 내쉬게 한다. 문학도들도 이러한데 다른 대학생들은 어떠할까? 글을 쓸 때 ‘~을 필요로 하다, ~로부터의, ~에 의하여 ~가 요구된다’ 같은 영어식 표현이라도 좀 덜 썼으면 좋겠다. ‘막대한 비용을 요하는 사업, 많은 협조 있으시기 바랍니다, ~에 다름 아니다, ~에 값하다, ~임에 틀림없다’ 같은 일본식 표현도 아직 많이 쓰고 있다.

광복절에 대형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은 채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타는 것은 애국과 아무 관련이 없다. 생활 가운데 깊이 들어와 있는 일본식 외래어라도 우리말로 바꿔 쓰려 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가득 채움을 만땅으로, 매머드나 대형을 맘모스로, 구멍이나 망침을 빵꾸로, 운동복을 츄리닝으로, 농축액이나 진액을 엑기스로, 월경이나 생리를 멘스로, 변압기를 도란스로, 지퍼를 자꾸로 쓰고 있다. 순일본어도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가. 가오, 곤조, 꼬붕, 기스, 나가리, 단도리, 도비라, 뗑깡, 몸뻬, 무데뽀, 분빠이, 사시미, 신삥, 유도리, 찌라시, 함바, 히야시, 히야까시… 애국애족은 우리말 사랑에서 시작돼야 한다.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정신을 생각하며 우리말 사랑에 적극 나섰으면 좋겠다.

이승하 < 소설가·중앙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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