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은 의사결정 나침반…시민의식 높아져야 참기능

입력 2013-10-04 13:36

여론은 민주주의를 이끄는 나침반이다. 정치인들이 정책을 입안할 때도 ‘여론에 물어보자’는 말이 단골메뉴다. 여론을 따르면 인기를 얻을 수 있고, 혹여 생길 수 있는 부작용도 여론이란 명분을 빌려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여론의 원리는 다수결원칙과 상통한다. 즉 다수의 의견이 옳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물론 다수원칙은 의사결정을 하는 데 반드시 옳음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결원칙엔 결정을 효율적으로 하자는 생각도 자리한다. 신라 화백제도의 ‘만장일치’로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할 바에야 다수가 결정에서 주도권을 갖고 신속하게 어떤 일을 처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다수원칙은 허점도 많다. 특히 억압적인 정치체제에서는 ‘다수’라는 명분을 씌워 진정한 민의를 왜곡하는 사례도 많다. 공익과 사익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익을 선택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적 본성도 다수결원칙의 약점이다. 이는 작은 단위의 조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수결이 합리적·효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기본원칙임은 분명하다.

#여론·다수결은 판단의 안내자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개인과 국가, 조직과 국가 등의 관계가 ‘이해’라는 변수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다. 수시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주로 토론을 거쳐 다수결에 의해 어떤 의사를 결정하거나 여론을 감안해 정책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론과 다수결은 동전의 양면처럼 그 본질적 성격이 비슷하다. 또한 다수결로, 여론으로 결정된 사안에는 본인의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론으로, 다수원칙으로 정해진 그 어떤 것이 항상 옳은가에 대해서는 수시로 의문이 제기된다.

개인의 의견이 모아진 것이 여론이고 다수결인데, 현실에선 개인이 의사 표시를 하고 여론을 형성할 때 주로 공익보다 사익에, 먼 훗날의 이익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 것도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대중의 어리석음’ 즉 중우(衆愚)를 경계한 때문이다. 여론정치나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이 때로 국가를 잘못된 길로 끌고 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은 공익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우선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정치권이 표를 얻고자 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재원 조달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복지라는 슬로건만 흔들고, 유권자들도 이에 혹해 표심이 흔들리는 것은 다수결에 도사린 함정을 시사한다. 끼리끼리만 뭉치는 ‘생각의 무리짓기’도 여론이나 다수결의 약점이다.

#공익과 사익의 딜레마

모든 사람은 공익과 사익 사이에서 수시로 갈등한다. 물론 공익과 사익이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복지는 공익과 사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세금 역시 내가 부담을 지는 사익 성격이 강하지만 결국 그 세금으로 내가 혜택을 받으니 공익 성격도 함께 갖는다. 하지만 일단 대중은 먼 미래보다 당장의 이익에 초점을 맞춰 선거 때 표심을 정하고, 어떠한 결정 때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수결이 원시적인 시각보다 근시적 안목으로 결정되는 사례가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의사결정의 핵심인 다수결원칙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려면 공익과 사익에서 균형을 잡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이른바 ‘교양시민’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시민이 많으면 다수결이란 명분으로 민의가 왜곡되고 어떤 집단의 뜻이 본질을 벗어나는 경우가 적어진다. 교양시민은 교육을 통해, 성숙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길러진다. 자유롭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돼야 함은 물론이다.

#여론조사와 통계의 함정

여론조사와 통계는 다수결원칙의 숫자적 근거를 제시하는 핵심이다. 현대는 모든 것을 숫자로 말하는 시대다. 숫자로 글로벌 기업들의 점유율을 보여주고, 여론의 향방을 알려준다. 통계는 사회 현상을 수치로 설명하는 현대의 자화상이다. 특히 경제통계는 정부의 정책 수립이나 기업의 투자, 개인의 소비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기초자료다. 여론도 마찬가지다. 후보들은 여론조사 지지율 등락에 연일 희비가 갈린다. 하지만 막상 실제 선거에서는 여론조사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도 흔하다.

통계 역시 자료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해석에 따라 때로 숫자나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경기전망에 대한 대표적 설문조사인 기업 경기실사지수(BSI)가 100이면 경기회복을 전망한 사람과 경기회복을 부정적으로 본 사람이 절반씩이라는 뜻인데 해석을 ‘50%나 경기회복을 전망했다’로 하느냐와 ‘경기회복 전망이 50%밖에 안 됐다’로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물론 다수결, 여론, 통계의 함정은 있지만 다수결원칙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핵심 의사결정 방식이고 여론과 통계 역시 정치나 경제, 일상의 주된 가이드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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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100% 믿지마라”…판단력 흐리는 숫자의 주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보다 글을, 글보다는 숫자를 더 믿는다. 특히 숫자의 소수점 아래가 길어지면 신뢰성이 더 높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정보화된 사회에선 숫자로 나타내는 통계가 경제정책이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영국의 작가 H G 웰스는 이미 100년 전에 “통계적 사고는 언젠가는 읽기나 쓰기와 마찬가지로 유능한 시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숫자와 통계는 수시로 마법(?)을 부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통계의 기본적 표현 수단은 퍼센트(%)다. 하지만 %는 자주 착시를 유발한다. 예컨대 어떤 주식이 500원에서 30만원으로 치솟으면 상승률이 6만%에 달한다. 반면 30만원짜리 주식이 500원으로 폭락하면 하락률은 99.9%다. 한마디로 많이 오르고 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상승(증가)률은 0~무한대 %로 확장되지만 하락(감소)률은 0~100%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되는 모집단이 작을 때도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1960년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여학생 입학을 허용한 뒤에도 반대자들은 여학생의 33.3%가 교수와 결혼했다며 단점을 강조했다. 무척 많은 여학생이 결혼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처음 입학한 3명 중 1명만 교수와 결혼한 것이었다. 오차 범위를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선거 출구조사에서 ‘A후보의 지지율이 51%이고 신뢰수준 95%에 오차범위 ±5%포인트’라면 A후보는 당선이 확실할까? 이는 A후보 지지도가 전체 유권자를 대상으로 조사하면 46~56%(51±5%포인트) 사이에 있을 확률이 95%라는 뜻이다. 당연히 이 후보의 득표율이 과반수에 미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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